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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부산 사나이 고인범, “연극·드라마·영화 … 무대가 좁다”

연기지평 넓혀 안방극장서 1인 3역 종횡무진
부산연극협회장 취임 "든든한 버팀목 될 것"

내용

부산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연극배우가 중앙으로 무대를 넓혀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연극무대를 뛰어넘어 드라마 · 영화에 출연하며 전국구 스타덤에 오른 부산 사나이, 고인범(55) 씨가 주인공이다. 그는 요즘 연극배우, 탤런트, 영화배우로 1인3역의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연기생활 34년째인 그를 세상이 뒤늦게 눈여겨 본 까닭은 뭘까?

부산 사나이 고인범. 연극무대를 뛰어넘어 드라마·영화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배고픈 지방 연극무대를 악착같이 지켜냈다. 돈이 되지 않아도 나태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 혼신을 다하는 성실함이 몸에 뱄다. 농익고 곰삭은 탄탄한 연기력도 갖췄다. 세상이 눈여겨 본 힘의 바탕이다.

그는 지금까지 연극 80여 편, 드라마 40여 편, 영화 13편에 출연했다. 올 1월에는 3년간 부산연극계를 이끌 부산연극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과반수 넘는 득표로 제21대 부산연극협회장에 뽑힌 것이다. 부산과 서울, 연극과 드라마, 지역과 장르를 초월한 맹활약이다.

모든 일은 확실하게 … 대충이란 없다

태평하고 느슨해 보인다? 절대 아니다. 욱하는 성격? 물론 있다. 뭘 하나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확실하게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가 출연한 연극, 드라마, 영화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가 출연한 연극은 영웅광대, 너도 먹고 물러나라, 가지 끝에 부는 바람, 대양7호 등 제목도 외기 벅찰 정도. TV는 2005년 KBS 드라마 ‘황금사과’에서 부산 말을 쓰는 형사 역을 시작으로 대조영, 대왕세종, 천추태후, 추노, 각시탈, 야왕, 그 겨울 바람이 분다, 투웍스 등에 출연했다. 영화는 2003년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를 시작으로, 우리 형, 밀양, 쌍화점, 주유소 습격사건2, 투혼, 완득이,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등에서 걸쭉하고 깔끔한 연기를 선보였다. 예사로 흘러가듯 대충해서 되는 역할은 하나도 없다.

“대본이 나오고, 드라마와 영화촬영이 시작되면 촬영장과 집 이외에는 잘 가지 않아요. 누구를 잘 만나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고, 술 한 잔 하다보면 과할 수 있잖아요. 대본을 못 외워 더듬거리거나, 본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연기에 어떤 시청자가 공감을 해주겠습니까?”

혹독한 중국어공부, 화교 팬클럽 생겨

그에게 대충이란 없다. 지독할 정도로 열정을 쏟는다. 부부동반 계모임에 4년 만에 나간 적도 있다. 얼굴 좀 알려지니 괜히 으스대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사지만 일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는 고집 센 성격을 아내도 어쩌지 못한다.

그에겐 독특한 팬클럽이 있다. 서울 화교학교 출신들이 만든 것이다. 사극을 하면서 워낙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하자 화교선배인 줄 알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KBS는 2008년 세종대왕 일대기를 그린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명나라 환관이자 사신 ‘황엄’으로 출연했다. 그의 대사는 99%가 중국말. 배역이 정해지고 2개월 넘게 중국어 배우기 강행군이 이어졌다. ‘대왕세종’의 공동연출을 맡은 김원석 PD의 중국어 가르치기는 혹독했다. 김 PD는 대학시절 중국어를 복수전공한데다 현지 유학까지 마쳐 중국사람 못잖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연기 · 대사 … 잠잘 때도 한다

“김 PD가 맨 첫날 중국어의 기본인 ‘사성’(4가지 억양)이 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대로만 대답을 하겠다고 했죠. 만리장성, 자금성…, 아무리 생각해도 2개 밖에 모르겠다고 했더니, 김 감독이 들고 있던 볼펜을 바닥에 집어던집디다. 진짜, 4성이 뭔지 모르느냐면서요.”

그게 시작이었다. 방송국 쪽방에 틀어박혀 중국어 대사를 익히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배고파 시계를 보면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있기 일쑤였다. 점심을 먹자고 하면 김 PD는 도시락을 주문했다. 저녁도 똑같이 도시락으로 때웠다. 어떤 때는 아침에 시작한 중국어 공부가 자정 무렵까지 17시간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악착같기는 그 역시 김 PD 못잖았다. 부산 본가를 오갈 때는 어김없이 대사를 녹음한 CD를 들었다. 잠잘 때도 손에 대본을 들고 머리맡에 CD를 켰다. 따라 외우다 잠들고, 퍼뜩 정신이 들면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신경성 위염에 걸렸다. 체중은 7㎏이나 빠졌다.

부산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연극배우 고인범은 연극무대를 뛰어넘어 드라마 · 영화에 출연하며 전국구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요즘 연극배우, 탤런트, 영화배우로 1인3역의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고인범이 2006년 방영된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열연하는 모습.

고인범은 2007년 KBS 드라마 ‘한성별곡’에서 강극수(병조판서 겸 선혜청 제조)역을 맡아 열연했다.

매사 최선 다하는 사람에게 기회 오는 법

그렇게 2개월 여가 흐른 뒤 첫 촬영에 들어갔다. 20차례가 넘는 NG 끝에 간신히 한 장면을 마치고 김 PD와 마주쳤다. 김 PD 얼굴은 어두웠다. ‘아, 또 깨지는 구나!’ 생각했는데 칭찬이 이어졌다. 힘과 자신을 얻어 ‘대왕세종’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그를 중국 사람이라 여겼다.

“대왕세종은 저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화교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으니 연기자로서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또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겼습니다. 저를 독려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가 명나라 사신 ‘황엄’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내자, 영화와 드라마의 러브콜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인 역할이었다. 중국인 역할을 넘어 자상하고, 인자하고, 때론 강단 있는 카리스마 연기제의도 곧잘 들어왔다.

그는 “단역조차도 최선을 다했기에 주변에서 잘 봐준 것 같다”고 말한다. 역할이 작다고 대충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때 그는 ‘월화엔 권상우 아빠, 수목엔 김범 아빠’로 불렸다. SBS 월화드라마 ‘야왕’,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동시 출연할 때다. 두 드라마 시청률이 상승하고, 그의 연기가 빛을 내자 시청자들은 두 드라마 제목을 섞어 ‘그 겨울, 야왕이 분다’고 화제로 삼기도 했다.

그는 1979년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연극과의 첫 인연도 ‘연극스럽다’. 부산의 한 전문대 화공과에 입학한 첫날 단원모집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극예술연구회 ‘나래성’의 창단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모집요강 아래쪽에 굵은 매직으로 쓴 단 한줄 ‘인생은 연극이다’는 말에 끌려 바로 입단했다. 연극의 묘미에 빠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 했다. 그러나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시국 때문이었다. 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계엄군을 앞세운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서슬 퍼런 시절, 연극한다고 설쳤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무대 한번 서 보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고인범은 80여 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부산연극제에서 우수연기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고 부산연극협회 부지회장으로 6년을 일했다. 올 1월에는 부산연극협회장에 취임했다. 부산연극계의 산증인이자 주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연기인생 34년 … 포스터에 끌려 시작

죽도록 연습을 했는데, 공연 한편 못해 본 것에 대한 아쉬움은 졸업 후에도 컸다. 제비표 페인트 대리점 일을 하며, 후배들과 저녁마다 연습을 이어갔다. 일과 공연을 5년쯤 병행했다. 5년이 지나자, 직업이 연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연극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 기계를 들였다. 낚시 추와 낚시용품을 만들어 자전거로, 오토바이로 납품이며 배달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을 동원한 가내공업이었다. 그런 일이 오래 갈 리 없었다. 이것저것 험한 일을 마다 않고, 연극에 매달렸다.

이후 그는 80여 편의 작품을 소화했다. 무대에 선 숫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탄탄한 연기력 없이는 소화할 수 없는 1인극 모노드라마를 공연했다. 부산연극제에서 우수연기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동서대학교 공연예술학부에 편입해 연극을 전공했고, 부산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다.

그 사이 연극을 아끼는 선배 도움을 받아 부산 남천동 KBS 맞은편에 엑터스 소극장을 지어 극장장을 맡았다. 눌원소극장의 월급쟁이 극장장을 맡아 선후배의 공연을 독려했고, 부산연극의 활로를 모색했다.

부산연극협회 사무국장 4년, 감사 3년, 부지회장으로 6년을 일했다. 그리고 올 1월 부산연극협회장에 취임했다. 부산연극계의 산증인이자 주연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부산연극 전통 · 정통 지킬 터

“무엇보다 부산연극의 전통과 정통을 지키는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배고픈 후배 연극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보겠다는 욕심도 있습니다.” 부산연극협회장으로서 그는 ‘부산연극인 인명사전’을 발행할 생각이다. 그동안 ‘부산연극사’ ‘부산소극장사’ 등은 정리가 되어 있으나 연극인들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구 세대의 조화에도 앞장 설 생각이다. “매달 회원들과 함께 연극 한 편을 보려합니다. 공연팀 격려도 하구요. 요즘 젊은 연극인들은 선배를 봐도 누군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배는 후배의 참신함을 배우고, 후배는 선배의 연륜을 익히도록 해야죠. 중앙무대에 진출해 성공한 부산출신 선배들이 후배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그들을 설득해 장학제도를 만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고인범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랄까. 영화배우? 탤런트? 서슴지 않고, 연극배우로 불러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연극연기로 잔뼈가 굵었고, 연기의 바탕이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을 빼고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극, 드라마, 영화, 모든 일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부산말의 묘미를 안방극장을 통해 전국에 전하며, 그 성과를 바탕으로 부산연극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최악의 결과란 없는 법이겠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작성자
글 박재관/사진 문진우
작성일자
2013-12-0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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