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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 가작

내용

며칠 전 지갑을 정리하다 낡은 스티커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코팅이 되어 있음에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이미 색이 많이 바래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 속에는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자와 우스꽝스런 가발을 쓴 남자 셋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15년 전 대학 시절 함께 야학을 했던 선배 부부와 형 그리고 나다. 친동생 이상으로 나를 살뜰하게 챙겨주던 사람들이다. 사진 속에는 없지만 이 빛바랜 스티커 사진을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풋풋해서 서툴렀던 첫 사랑의 아픈 상처가 조금은 아물어갈 무렵, 다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도 행복한 일인 지 알게 해준 그 사람이다. 사진 속의 우리들과 그녀는 야학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된 나는 우연한 계기로 한 야학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그 사람들을 만났다.

1999년 겨울, 방학이라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에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선배들과 그녀가 겨울 바다가 보고 싶다며 무작정 1박 2일 일정으로 부산 여행을 왔다. ‘집에 배가 몇 척 있느냐?’,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해댈 정도는 아니지만 다들 서울사람들이라 낯선 도시, 부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겨울, 바다 그리고 여행에 대한 묘한 설렘과 기대로 그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부산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역시 바다가 있는 그곳 해운대였다. 늦은 시간이라 바다는 이미 짙은 어둠 속에 숨어버린 뒤였지만, 차가운 파도 소리와 서걱대는 모래의 감촉만으로도 여기가 겨울 바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선배들이 밀려드는 파도와 유치한 장난을 치는 동안 그녀와 나는 여느 연인들처럼 백사장을 거닐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이라 걸을 때마다 서로의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행복했었다.

밤늦게 야학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우리는 같은 방향이라 함께 가는 날이 많아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지만, 서로에게 연애 감정이 생긴 건 아마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찻집으로 내가 찾아간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둘이서 멀리 여행을 가기엔 조금 일렀던 우리에게 선배들과의 부산 여행은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차가운 밤공기는 자연스레 그녀가 나와 팔짱을 끼게 만들었고, 젊음과 낭만의 도시 부산의 겨울 바다는 우리를 수줍게 시작하는 선후배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으로 바꿔놓았다.

내게 있어 부산의 겨울바다는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님 같다. 고등학교 시절 알 수 없는 청춘의 고민들을 털어놓은 곳도, 처음 대학 입시에 떨어졌을 때 친구와 신세한탄을 하던 곳도, 바로 이곳 바다였다. 아무 말 없지만 모든 걸 다 이해해 줄 것만 같은 가슴 넓은 겨울바다에 마음 속 생각 하나 내려놓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다. 그날의 우리들도 여행의 열기가 조금 사그라질 즈음 다들 말없이 겨울바다를 응시하며 고해성사를 하듯 저마다의 사연 하나씩 풀어놓았다. 아마 그날 그녀는 나와 같은 고백을 했을 것이다.

해운대를 찾은 여행객들이 두 눈 가득 바다가 넘쳐날 무렵 자연스레 발길을 돌리는 곳은 달맞이 고개다. 우리 일행도 택시를 타고 달맞이 고개에 올라 가장 멋있어 보이는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는 건 부산 여행을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작은 행복일 것이다. 우리 또한 그런 소박한 기대를 품고 멋진 카페에 들어갔는데,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여행 경비가 넉넉지 않았던 우리에겐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그녀와 둘만 왔다면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러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둘이 아니라 다섯이었고 우리 중에는 용감한 아줌마, 선배 누나가 있었다. ‘쪽팔림은 순간이고 잠시 쪽팔리면 광어회를 먹을 수 있다’ 는 누나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다들 물만 한 잔 얻어 마시고 조용히 카페를 나왔다.

사실 생각해보면 가격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젊은 날의 치기로 그런 용기를 낸 듯하다. 지금은 재밌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지난날의 작은 해프닝이지만, 그때는 제법 큰 용기가 필요했을 만큼 우리에겐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선배 누나의 결단 덕에 전망 좋은 카페에서의 커피 한잔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대신 근처 바닷가에서 맛있는 회를 배부르게 먹었으니 가난한 우리들에겐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송정 어느 민박집에 짐을 푼 우리는 밤새 이야기의 꼬리를 이어가며 부산에서의 첫날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때의 우리들은 하루쯤 자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청춘들이었다.

다음 날 부산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찾아간 곳은 태종대였다. 지금 같으면 사람 냄새나는 자갈치나 남포동 시장 골목을 구경하러 갔을 텐데 그때 서울에서 온 촌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바다를 보고 싶어 했기에 차도 없이 송정에서 태종대까지 그 먼 길을 힘들게 갔다. 그렇게 찾아간 태종대에서 우리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날의 바다가 우리 다섯이 함께 본 마지막 바다였다는 것이다.

다음해 겨울 꼭 다시 와 달맞이 고개 그 카페에서 다 같이 커피를 마시자던 우리들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그날의 부산 여행을 계기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어긋난 감정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결국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한다. 다시 겨울이 오기 전 그녀는 야학을 그만두게 되었고, 나는 어둡고 긴 또 한 번의 이별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었다.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는 지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하던 선배 누나는 그 무렵 갑상선에 암이 생겨 수술을 해야 했다. 다시 건강해지면 다 같이 부산 여행을 가자고 웃으면서 약속했는데, 갑상선에 생긴 암이 대장으로 전이되어 결국 누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날의 그 사람들 중 둘은 내 곁에 없다. 세상을 먼저 떠난 선배 누나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녀, 두 사람과의 추억만이 희미한 스티커 사진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순간 놓쳐버린 인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인연이기에 우리는 추억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추억하는 것뿐이기에 지나간 것들은 그립고 아쉬운 것이다.

얼마 전 사랑하는 아내와 달맞이 고개를 갔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추억이 남아있는 카페에 들러 차 한 잔을 나누고 돌아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잊혀지는 것이 많아지다 보니 한번 찾아온 그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듯하다. 화석처럼 켜켜이 쌓인 기억들 속에서 가끔 그날의 부산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한때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귀한 인연들은 한번 뿐인 추억이기에 아름답고 감사한 것이다.

작성자
이동훈
작성일자
2013-11-2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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