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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신선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부산 곳곳에 ‘신선’ 머문 자리… ‘인간은 신선을 꿈꾼다’
이야기 한마당 - 신선 오간 텃자리를 찾아서

내용

신선은 땅을 밟지 않고 바람과 안개, 구름을 따라 천의무봉의 옷자락을 날리며 공중으로 자유자재로 오가며 이슬을 마시고 선산(仙山)의 불로초를 먹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를 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허덕이는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불로불사의 신선이 얼마나 그리운 존재였겠는가.
 

바닷가 신선 오간 곳

산과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수려한 옛 부산, 이 지역으로 안개와 구름을 따라 신선이 오간 자취는, 곳곳으로 남아 있는 지명(地名)이 그 유래를 말하고 있다.

신선이 노닌 곳을 중국의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는 "동해 바닷가에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이 있는데 이 세 산을 신선이 사는 '삼신산'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산들은 상상 속의 산이다. 그런데 이 상상 속의 산이 부산에 있다. 영도의 봉래산과 중구 영주동의 영선산이다.

영도를 형성하고 있는 봉래산 이야기부터 해 본다. 영도는 지금 봉래산 중턱까지 20만 인구가 북적거리고 있지만 옛날 옛적은 인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한적한 외딴 섬으로 항상 구름에 싸여 있었다. 그 안개와 구름 속으로 신선이 천의무봉의 옷자락을 날리며 오간 것 같다. 그래서 동해바다의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으로 이름한 것이리라.
 

푸른 학 노니는 '청학동'

봉래동은 봉래산의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그리 이름했고, 영선동(瀛仙洞)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의 신선이 오간다고 하여 그리 이름했다. 신선동(新仙洞)은 여자 신선, 다시 말해 새 신선의 곳이라 하여 그리 이름하고, 청학동(靑鶴洞)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푸른 학이 내리는 곳이라 하여 청학동이라 했다.

영도의 봉래산 신선 이야기는 이 뿐이 아니다. 봉래산의 동쪽 끝자리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다. 지금은 태종대를 태종대 등대 남쪽 30m 지금의 자리 절벽 아래 평평하게 바다로 향해 나란히 선 두 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이 두 대 가운데 바다를 향해 있는 오른쪽 대를 신선이 와서 바다경관을 즐겼다고 하여 신선대라 했고, 왼쪽 대를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하여 태종대라 했다.

하지만 어느새 두 대 모두를 태종대라 하게 됐지만 지금도 두 대를 나누어 말할 때는 오른쪽을 신선암, 왼쪽을 태종암이라 한다.

바닷가 신선의 곳은 봉래산 뿐이 아니다. 영도의 바다 건너 지금의 남구 지역에도 그 날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것은 문현동의 광선대(廣仙臺)와 용당의 신선대(神仙臺)이다.

부산 곳곳에 ‘신선’ 머문 자리… ‘인간은 신선을 꿈꾼다’
이야기 한마당 - 신선 오간 텃자리를 찾아서

영선고개의 유래

광선대는 지금 배정 초·중·고등학교가 있는 넓은 터를 신선이 와서 머무는 자리라 하여 넓은 '광(廣)'의 광선대였다. 그런데 지금의 배정학교 북쪽 길가에 광복 후까지 '徐市過此(서시과차:서시가 이곳을 지나다)'라는 돌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서시는 진나라 진시왕이 삼신산으로 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서복(徐福)을 말한다. 서복이 떠날 때는 동남동녀 3천명을 배에 실어 보냈다고 하는데 그 3천 동남동녀가 불로초를 찾아 봉래산으로 왔다가 이 광선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구 용당동의 신선대는 지금은 주위로 도로가 개설되고 아래로는 컨테이너 부두가 되어 신선이 오갈 경치를 잃고 있지만 지난날에는 숲이 울창하여 그 안으로 들면 신선이 부는 피리소리가 들리고 바위에는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유상(遊賞)한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최치원이 그의 말년에 남도를 순유한 것은 신선사상에 근원한 자연관에서 온 것으로 본다. 이 신선사상이 후대로 이어진 자취는 중구 영주동에서도 볼 수 있다. 영주동은 영선산(瀛仙山:뒷날 산이 깎이어 없어짐)에서 유래했다. 영선산에는 조선시대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어 있을 때 그 왜관을 관리하는 관청인 임소(任所)가 현재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강가 신선의 그 날 그곳

그 임소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관리가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산과 바다의 경관이 영주산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내려다보이는 산을 영선산이라 한 것이 뒷날 영주동이 되고 그 고개를 영선고개라 하게 됐다.

부산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바다와 강으로 널브러져 경관이 빼어났다. 그래서 안개와 구름과 함께 신선이 오갔기 때문인지 강선대(降仙臺)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많다.

덕포동에는 상강선대와 하강선대가 있다. 두 강선대 모두 지금은 큰바위가 뭉치고 고목으로 우거져 있으며, 주위는 시가지로 메워져 옛 자취를 잃었다. 그러나 옛날 옛적에는 해마다 음력 12월 1일이면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쉬었다고 한다.

하단동에도 강선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에덴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본래 이름이 강선대였던 하단동의 강선대에는 승학산(乘鶴山)의 신선이 낙동강의 경관이 좋아 학을 타고 내려 쉬었던 곳이라 한다. 강서구 대저동에도 선인(仙人)의 곳이 있다. 지금의 김해비행장 주위는 약 3천년 전쯤은 바다였다. 그곳에 7개의 작은 산이 있어서 '칠점산(七點山)'이라 했다.

그 칠점산에 선인이 살아 지금의 김해시 불암동의 초선대(招仙臺)에서 가락국의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부르면 선인은 배를 타고 초선대에 가서 가야금을 타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겸효대와 소하정 이야기

내륙에도 선인(仙人)들의 곳이 많다. 선인이란 자연 속에서 무욕(無慾) 청정(淸淨)의 경지에서 산 사람들이다. 이 선인이 산 곳을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의 기록만을 들추어도 겸효대(謙孝臺)와 소하정(蘇蝦亭)이 있다.

겸효대는 오늘날의 연제구 연산1동과 6동의 뒷산인 배산(盃山)에서 세속을 떠나 신선처럼 노닌 김겸효가 살아서 겸효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소하정은 지금의 금정산 아래 금정구의 금정초등학교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소하라는 선인이 항상 흰 사슴을 타고 금구선인(金龜仙人)과 놀았다고 한다.

신선이 오가고 선인이 머문 자리는 그 날의 이곳 부산에는 곳곳으로 남아 있다. 오늘 한때만이라도 그 날의 그곳에서 그 날의 신선이 되고 선인이 되어보고 싶은 심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6년 3·4월호
작성일자
2013-08-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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