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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힘없는 나라 백성의 비애

일본 군함 부산항 무력시위… 천지 진동시킨 일본 군함 대포소리
이야기 한마당 - 부산개항 그 이전의 수수께끼

내용

미국이 아시아의 시장 개척과 식민지화를 꿈꾸고 무력으로 일본의 항구(港口)를 열게 한 것은 1854년이었다. 일본은 이 개국(開國)으로 그때까지 지방 토호(土豪)들이 분할 독점하고 있던 지역 연합체인 막부체제(幕府體制)가 해체되고 절대권력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1867년 천황제(天皇制)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왕정복고(王政復古)가 된 것이다.

일본 외무성이 보낸 통교(通交) 교섭

일본 명치정부는 이 사실을 주변 국가에 알렸는데 우리나라에는 1868년 12월 부산에 있는 왜관으로 일본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의 왜학훈도(倭學訓導:일본어 통역이자 우리나라 외교관)인 안동준(安東晙)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서계(書契:외교문서)를 제출했다. 제출한 서계는 동래부사(東萊府使)에게 전해지고 동래부사는 중앙정부인 조정으로 올리게 돼 있었지만 그 당시의 외교적 제반 사항은 동래부사가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관의 우리측 훈도가 외교문서인 그 서계를 살펴보니 대마도와 동래부 사이 오고간 종전의 서계형식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내용상의 용어도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왜학훈도 안동준은 동래부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동래부사는 조정에서 국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大院君:고종임금의 아버지)의 심복인 정현덕(鄭顯德)이었다.

쇄국 일변도의 대원군의 심복인 정현덕이 그 서계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안동준에게 지시했다. 국가 간 새로운 국교가 열어지기를 바라는 일본측 서계는 동래부사 정현덕으로 인해 거부된 것이다. 그것이 5년 넘게 이어졌다. 그 사이 일본측 사신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 서계의 내용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동래부의 완고한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부산항에서 일본군함 무력시위

동래부에서 서계 접수를 거부하고 있는 사이 일본은 부산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872년 1월에는 그 동안 오간 범선(帆船)도 목선(木船)도 아닌 동력으로 움직이는 크나큰 철제 기선(汽船) 만주환(滿珠丸)을 몰고 들어와 부산항에서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시위를 했다.

5월에는 용두산 주위에 있던 초량왜관의 왜인들이 왜관을 뛰쳐나와 동래부에 난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1872년 9월에는 일본 군함 춘일함(春日艦)과 유공함(有功艦)이 해군 군인을 싣고 부산항으로 들어와 시위를 벌이면서 그 동안 동래부가 관리하고 있던 왜관을 일본 외무성이 일방적으로 접수·관리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본 외무성 직원을 왜관에 상주시켰다.

9월 22일이 되자 군함 춘일함은 일본 임금의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부산항에서 축포(祝砲)라 하여 21발의 대포를 쏘아 천지를 진동시켰다.

일본 무력시위에 놀란 우리의 대응(對應)

일본 해군들이 부산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우리측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873년 4월 15일 부산성(지금의 범일동 자성대성) 아래 바다에서 이어진 개운포진(지금의 좌천동 앞바다)을 거처 왜관 앞(지금의 동광동과 영도 앞바다)으로 우리 수륙군 합동의 시위연무(示威鍊武)가 있었다. 5월 13일에도 수십 척의 배로 시위연무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외무성에서 파견돼 온 직원이 왜관에서 바라보고 제나라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이 보고에는 우리의 조련(調練:시위연무를 말했음)을 일본이 옛날 행한 고류(古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타고 있는 배는 어선에 지나지 않고 병사들은 농부들이 상복(常服)을 입고 승병(僧兵)이 가담했는데 무기는 칼과 창과 활이고 지휘자격인 사람이 소총(小銃)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 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우리의 시위연무를 얕잡아보고 한 것이라 해도 그 무렵 군함을 몰고 대포를 장치하여 부산항에 들 정도의 그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무력이었다.

우리의 시위연무는 열세에 몰린 우리의 군사력이 안타까워서 한 일일 것이다. 동래부사 정현덕은 1873년 대포 3문(門)을 주조(鑄造)하고 동래성 안에서 발사시험을 했다. 그러나 그 대포는 발사와 함께 산산이 파열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실도 일본 외무성에서 와서 왜관에 머물고 있던 외무성 직원이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부산지역 주위는 대포 하나 비치돼 있지 않다는 보고도 했다.

영도 앞바다 화약폭발 사건

1874년 3월 18일 영도 앞바다에서는 화약폭발사건이 크게 일어났다. 이도 열세에 몰린 지방 군사력을 어떻게라도 일으켜 보려는 지방 위정자의 안타까움에서 온 일이 아닌가 한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 우리측은 그 진상이 미궁에 빠져 있지만 일본 외무성에 보고된 내용은 구체적이다.

그에 의하면 용두산 주위에 있던 왜관 앞의 영도의 봉래동 바닷가에서 폭발음이 난 것은 비가 내리고 있는 밤 11시경이었다. 이튿날 정황을 살피니 우리나라 배 2척은 침몰해 있고 우리나라 사람 12명이 그 폭발로 인해 시체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관에서 통역의 일을 도와주던 박사원(朴士源)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시체의 인양(引揚)이나 비용은 배통사(陪通事:왜관의 일본어 통역) 최재수(崔在守)에게서 나오고, 죽은 이의 가족이 최재수에게 항의하는 것으로 보아 화약을 부리는 일에 동원된 인부는 최재수가 모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저런 일로 미루어 보아 최재수가 일본인에게 밀무역을 부탁하고 일본에서 화약을 일본인의 배가 실어 왔을 것이라 했다.

그때 화약은 일본에서는 금수품(禁輸品)이 되어 밀무역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 화약을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 횃불을 들어 우리나라 배에 옮겨 싣는 과정에서 횃불이 화약에 붙어 폭발했을 것이란 견해다. 그러면서 그 보고서에 나타나는 여러 통역들 이름이 정확하다.

그 통역들은 동래부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훈도(訓導) 아래의 직원들이다.

안타까운 우리의 치부

그런데 이 화약에 대해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를 쓴 일본인 도갑(都甲)은 동래부가 무기에 상용하기 위해 밀수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국에 저항하기 위해 상대국에서 화약을 구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밀매매라 해도 이율배반이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 직원이 본국에 보고하는 보고서는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인 도갑(都甲)의 견해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봉건으로 치닫던 조선말의 조정은 그 당시 피폐의 극에 이르러 지방 군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통교교섭(뒷날의 개항교섭)을 위해 무력시위를 지방 항구에서 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태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지방수령의 안타까움이 지방 자체적인 무기생산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한 화약폭발 사고가 아니었을까?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영도 바닷가의 화약폭발,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 무슨 치부(恥部)를 폭로한 것 같아 개운치 않다.

다만 그 폭발사고로 죽음을 맞은 12명의 생령과 함께 국력이 민생을 좌우한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 없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5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07-1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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