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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동방예의지국에 웬 벌거숭이들이!!

일본인 자갈치에서 해수욕 즐겨… 최초의 공설해수욕장 ‘송도’

내용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왜관(倭館)을 "조선 때 일본사람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통상(通商)을 하던 곳으로 지금의 부산에 있었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본인과 무역하던 곳이 조선시대 부산에 있었다는 말이다.

왜관의 맨 처음은 1407년(태종 7년) 오늘날의 동구지역인 부산 진시장 근방에 두었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9년에는 지금은 '옛 왜관'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고관'이라 하는 수정동에 두었다가 1678년에는 오늘날의 용두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두었다.

초량왜관의 유래

용두산 주위에 있던 왜관을 '초량왜관'이라 했다. 이때는 지금의 초량 이남은 모두 초량이라 하였기 때문에 용두산을'초량소산(草梁小山)'이라 했고, 그 초량소산에 있는 왜관이 되어 초량왜관이라 한 것이다. 초량왜관은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는 1876년까지 존속했으니 198년 간 일본과 무역통상을 해 왔다.

용두산 주위가 왜관이 되어 있을 때는 그 넓이가 36만3천㎡나 되었는데 주위로 돌담이 있어 장사하러 온 일본인도 왜관 안에 있는 개시대청(開市大廳)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었을 뿐 함부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종전의 왜관 선창이 개항되자 왜관의 돌담은 철거되고 일본정부는 종전의 왜관 자리를 조선정부에 1년에 50원(일본화폐)씩 땅세를 내고 조차지(租借地)로 빌렸다.

이 조차지를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라 했다. 일본전관거류지는 그 지역 안에 집을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선창을 이용 관리하는 일들은 일본인이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내맡겨져 있었다.

자갈치 해수욕장의 진풍경

그렇게 개항과 함께 일본전관거류지가 생기자 일본인들이 전관거류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그들은 오늘날의 광복동과 동광동 지역에 주거지와 점포를 세우고 그들의 선박이 가져오는 상품을 받아 장사를 했다.

그 상품은 메이지유신으로 우리나라보다 개화를 일찍 한 그들이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생산한 물품과 서구에서 수입한 상품들이었다. 이들 상품들은 이 지역에서 모두 소비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으로 퍼졌다.

부산으로 와서 물품을 받아 서울이나 지방으로 거래하는 도매상 소매상 들이 많았고 딴 지역에서 물건도 사고 거류민지역을 구경삼아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한여름만 되면 거류민지역에 우리나라 손님이 뚝 끊어지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일본거류민들은 자갈치 해수욕장 때문이란 것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거류민지역으로 오는 일본인은 대마도와 일본의 서부지역인 바닷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일본인들은 여름이면 해수욕을 좋아했는데 거류민지역은 지금의 용두산 주위로 한정되어 있고 보니 딴 곳으로는 갈 수 없어 그때는 남빈(南濱:마나미하마)이라 한 자갈치에서 해수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수욕은 상것들의 짓거리

그 당시는 남포동과 중앙동 바닷가가 매축되기 전으로 지금의 남포동길(PIFF광장) 남쪽이 바닷가의 자갈치였다.

일본인 상가는 바로 이웃이었고 그 자갈치는 물길에 씻기고 깎이어 동글동글 몽돌의 자갈밭이 되어 해수욕하기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은 한여름 더운 날에도 남에게 맨살을 보이지 않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었다. 미역을 감아도 남의 눈을 피한 밤이나 계곡에서 은밀한 가운데 행할 뿐이었다.

더욱이나 간물인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일은 바다 일을 하는 사람 이외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대낮에 온 사람이 보는 가운데 벌거숭이가 되어 남녀가 무리지어 바닷가에서 미역을 감는 것이었다.

자갈치의 여름이 그렇다는 말이 퍼지자 우리의 양가집에서는 그 민망스런 꼴을 보지 못하게 자녀들이 일본거류지로 출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와 함께 일반인도 그들의 해수욕을 상것들의 상놈 짓거리라 하여 그곳으로 가는 것을 피하니 손님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공설해수욕장 '송도'

그러다 1910년 소위 말하는 한일합방이 되었다. 일본인도 우리 국내 어느 지역이나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여름의 해수욕장 옮기기가 시급했다. 그래서 지금의 송도지역에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섬이 되어 송도(松島)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송도에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고관이 오면 그곳에서 접대하는 한편 해수욕장을 개발하기 위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일본인이 설립했다. 그 송도유원주식회사는 송도라는 섬을 완전히 깎아 내려 1913년 수정(水亭)이란 휴게소를 지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거북섬 자리가 된다.

지금의 암남동 일대를 송도라고 하는 그 송도란 이름의 유래가 된 섬인 송도는 없어지고 '수정'이라는 이름이 되었던 그 '수정'도 바닷바람에 일제강점기의 그 날에 무너지고 그 밑자리에 남은 바위반석이 거북이 같다 하여 지금은 거북섬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송도해수욕장만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생긴 공설해수욕장으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4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05-2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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