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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안타까운 사연 지닌 괴정 회화나무

이야기 한마당-괴정 팔정자(八亭子) 이야기

내용

부산의 일부 지역은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말의 생산지였다. 나라에서는 전쟁마당에 소요되는 기마(騎馬), 교통을 위한 승마(乘馬), 관원의 출장과 공문전달을 위한 역에 두는 역마(驛馬) 등의 수요가 많았다. 조선시대는 ‘말의 부(富)가 나라의 부’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 현재의 영도)도 섬이 되어 신라 때부터 국마장이었다. 절영도에서 생산된 말을 절영마(絶影馬)라 하여 삼국사기와 고려사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절영마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부산신항의 중심지가 되는 가덕도도 조선초기는 웅천현(熊川縣)에 속하는 목장지대였다. 그런데 섬이 아니라도 조선시대 초·중기까지는 말을 방목하기 용이한 바닷가 지역에는 목장을 두었다. 오늘날의 사하구 서구 동구 남구 등에는 목장이 있었다.

국마장 절영도

그것은 동래부지(東萊府誌 : 1740년 刊)의 성곽(城郭)을 밝힌 자리에 목장성(牧場城)이 나오는데, 그 목장성이 세군데 있다고 하고는 그 하나는 낙동강변의 엄광산(嚴光山 : 사하구 엄궁동 지역)에서 범천산(凡川山 : 동구 좌천동)까지의 15리 사이이고, 또 하나는 다대포 강변에서 석성산(石城山 : 서구 용마산) 비탈까지의 10리 사이이고, 또 하나는 황령산(부산진구 전포동) 사이 약 15리 정도라 했다. 그 지역은 북쪽 산으로 성(城 : 주로 나무로 얽어 짠 목책성(木柵城))을 쌓으면 남쪽은 바다와 강으로 말미암아 말이 달아날 수 없으니 그 안에서 말을 기를 수 있었다.

동래부지를 쓴 1740년에는 모두 허물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그 무렵은 말의 방목이 잘 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이전은 국마장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조선초기인 1469년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석포목장(石浦牧場)에는 목마(牧馬)가 232필(匹)이 있고, 오해야목장(吾海也牧場)에는 739필의 말이 있다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석포목장은 지금의 남구 대연동, 현재의 부산박물관 주위를 말했고, 오해야항(吾海也項)은 이설(異說)이 있으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오해야항의 위치를 동래현(현재의 동래구)에서 서쪽으로 43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동래부지는 목장리(牧場里 : 사하구 괴정동)를 동래현에서 40리라 했다. 그러니 오해야항은 오늘날의 괴정동 가까이가 된다.

해동지도(海東地圖)는 오해야항을 석성산 서쪽에 적어 넣고 있다. 이 역시 오늘날의 괴정동과 오해야항은 거의 같은 지역임을 밝혔다.

오해야(吾海也)는 ‘마구간’으로 말이 들어가는 외양간을 한자의 음을 따서 이두식(吏讀式)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월인석보(月印釋譜 : 1459년 刊) 두시언해(杜詩諺解 : 1481년 刊)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다대첨사가 목장 관리

그런데 목장관리는 통제력이 강한 수군(해군)의 다대포첨사(무관으로서 우두머리 벼슬)가 감독관(監督官)이 되어 목장관리의 책임을 겸하고 있었다. 그때의 다대포첨사는 정3품 당상관이었다. 동래부사가 문관으로서 정3품 당상관이니 첨사는 부사와 맞먹는 위계였다.

그 당시 지역 무관의 수장(首長)은 선참후계(先斬後啓 : 죄인을 먼저 베고 임금에게 보고 함)의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동래부지에 나타난 오늘날의 사하구 괴정동 당리동 하단동은 목장의 중심지가 되어 사천면(沙川面)의 목장리(牧場里)라는 행정동리명이었다.

이 지역은 지금도 오목한 분지(盆地)가 되어 있지만 그 때도 초원이 좋고 비탈이 민듯해서 말이 자유롭게 먹고 뛰어다니기 좋았을 것이다.

그때 말이 몰려드는 곳은 지금도 마곡(馬谷 : 오늘날의 괴정4동) 주위였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 모이는 골짜기라 하여 ‘마곡’이란 이름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 국마장이 성가신 존재였다. 다대포첨사는 주민에게 말 관리를 엄하게 지시했다. 강과 바다를 가져 반어반농(半漁半農)이라 해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방목의 말로 해서 논밭작물의 피해가 심각했다. 말이 달아나지 않게 목책(木柵)성을 구축한다거나 석성을 쌓고 고치는 일 또한 부담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그러한 어려움이 있는 반면 다대첨사인 감독관도 여간한 고민이 아니었다. 나라에 받쳐야 할 말은 할당이 되어 있는데, 그 말이 국마성(國馬城)을 넘어 달아나서 그 수가 줄어들기도 하고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그 말을 주민 또는 타지 사람이 몰래 잡아먹는 일도 있었다.

괴정동의 회화나무 전설

그런데 이는 하나의 전설이지만 지금의 괴정동에 회화나무(槐木 :  괴목) 여덟 줄기가 땅밑에서 솟아올라 개별적인 줄기가 된 여덟 나무의 팔정자(八亭子)가 있었다. 그 팔정자로 다대첨사가 국마장 순시를 왔을 때 마을의 여덟 사람이 국마장으로 인해 입는 주민 피해와 목장으로 말미암은 부역의 과다함을 항의했다.

그 항의 과정이 지나쳤는지 다대첨사는 국법을 어긴다 하여 그 사람들을 처형하고는(선참후계의 권한으로) 팔정자인 회화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괴정동 뒷산에 국마성으로 축성했다고 보는 석축이 대티고개에서 당리 뒷산까지 약 3㎞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뒤쪽 산골에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인 성지(城址)는 이 팔정자 사건이 전설이 아닌 실제 사실이라면 이 팔정자 사건이 일어난 전이거나 후에 수축하였거나 신축한 게 아닌가 한다.

그것은 딴 지역은 목책성인데, 이곳만 공고한 석성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일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이 팔정자 사건이 있은 뒤 베어 버린 회화나무에서 다시 회화나무가 솟아나서 여섯 기둥이 된 회화나무가 지금 시가지 한가운데가 된 괴정동 870번지에 600년 수령의 노거수로 살아 있다. 그리고 동래부지에 기록돼 있던 마을 이름 목장동이 1904년 발간의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서 괴정동으로 바뀌었다.

이 괴정동은 회화나무의 한자 이름인 槐木(괴목)이 되어 괴정동이 된 것이다. 현재는 괴정(괴목의 정자)에서 마을사람들이 해마다 양력 5월7일 제(祭)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600년생 회화나무를 국가가 관리 보호하는 천연 기념물 제316호로 1982년에 지정한 바 있는데 나무가 노쇠하여 관리하기 어렵다 하여 3~4년 전에 천연 기념물에서 제외되어 마을의 보호수로 보호되고 있다. 현재까지 탈없이 생명을 지키고 있는데도 어찌 천연 기념물에서 제외되었을까?

제외된 근원에 대해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노거수는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한 보호되어야 한다. 아니, 생명이 유지되도록 최선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건전한 국가지정 천연 기념물이 마을보호수로 전락한 원인이 석연치 않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3년 5·6월호
작성일자
2013-04-1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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