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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박영효의 묘지는 진짜 명당이었을까?

이야기 한마당 - 다대포 ‘박영효’의 묘지터

내용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철종 임금의 사위다.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으로 있을 때 개화당 요인과 협의하여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수구파(守舊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 때 박영효는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삼일천하(三一天下)에 그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죄가 용서되어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자주적 개혁을 꾀했지만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 때는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대신암살 음모사건으로 1년 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고 일본 귀족원(貴族院)의원이 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일로 친일파(親日派)라는 국민적 눈총을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했던 박영효의 삶

그러했던 박영효가 부산과 이렇다할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해운대에 크나큰 별장을 가졌고 죽어서는 명당자리로 일컬어진 다대포 산자락에 묻혔다.

해운대의 별장은 수영에서 해운대로 가는 큰길에서 동백섬으로 꺾어드는 오른켠으로 지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운촌(雲村)에 있었다.

그 운촌의 별장을 이곳 주민들은 별당(別堂)이라 했는데 그 별당과 함께 주위 지역까지도 별당이라 했다.

박영효의 평생, 그러니 조선말에는 철종 임금의 사위라는 왕가의 힘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왕가에서 내린 후작이란 작위와 귀족원 의원이란 막강한 힘을 과시한 사람이다.

그러했던 그는 죽은 이후까지를 생각해서는 지관(地官)으로 하여금 전국에서 가장 빼어난 묏자리 명당(明堂)을 찾게 했다.

그렇게 지관이 찾아낸 자리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다대포 산비탈이었다.

전국 최고의 명당 '다대포'

그 자리는 본래 국유지였던 것으로 박영효는 당시의 조선총독부 사이또오 총독을 움직여 광범위한 넓이를 박영효 개인이 불하받아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

그는 1939년 79세로 서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유언에 따라 다대포의 산에 묻히게 되었다. 그렇게 묻힌 것이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인데 그날은 세상이 요란했다는 것이다.

박영효의 시신을 실은 관구(棺柩)는 서울에서 출발한 특별열차로 부산역에 닿고, 그 관구는 부산역에서 영구차에 실려 다대포까지 왔는데 그때 일본인 도지사가 일본 후작 작위를 가진 귀족원 의원의 영구를 모시느라 설쳐대는 바람에 길가에는 조의를 위한 사람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장지인 현재의 다대포 본동 뒷산은 장사지내는 장사행사를 구경하려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사람마다 명당에는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고는 서울의 임금님 사위가 죽어서까지 여기까지 오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박영효의 무덤자리는 태백산맥 맥줄기가 다하면서 마지막 기운을 모은 혈(穴)인 양, 앞으로는 바다가 널브러지고 뒤로는 봉화산 응봉이 지키고 있다. 장사 날은 다대포 온 마을이 크게 들썩거리면서 앞으로 다대포도 발복(發福)할 거란 것이었다. 박영효의 후손이 저 명당으로 해서 발복을 크게 하면 우리에게도 그 복의 끝자락이 내비쳐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폐허가 된 박영효의 묘지터

그런데 그 기대를 저버리고 해방 이후 박영효의 손자란 사람이 무덤터를 남에게 팔고 무덤을 파헤쳤다는 것이다. 무덤을 파헤친 것은 무덤 속에 무슨 보물이라도 묻혀 있지 않을까 하는 후손들의 가당찮은 욕심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박영효의 무덤터와 주위 산지(山地)는 남의 손에 넘어갔는데 무덤터를 산 사람은 송도에서 큰 요리점을 하던 사람이라 했다. 그 뒤 그 송도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자 박영효가 묻혔던 그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송도의 그 분도, 그 무덤속 주인이 오래 되지 못하고 현재는 폐묘(廢墓)로 봉분조차 없어진 밭이 되어 마늘과 겨울초 같은 것이 심어져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 무덤터는 약 1천650㎡쯤 되는데 그 주위는 현재 아파트와 2·3층의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무덤터는 녹지도 산지(山地)도 아닌 버려진 땅이 되어 있다. 그 위치는 다대1동사무소에서 서쪽으로 50m 정도다.

다대초등학교에서는 큰길인 다대로를 건너 서쪽 60m쯤 가야 한다. 그 주위는 철조망이 둘러졌는데 철조망 아래에는 빈깡통과 지저분한 쓰레기가 쌓였다. 소나무 사이에는 이곳저곳 제멋대로 밭이 일구어져 정돈된 시가지 한가운데 남겨진 진개더미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그래도 무덤이 있었던 자리에는 한 쌍의 망(望柱石) 돌기둥이 남아 있지만 무덤 앞에 장치로 놓였던 양석(羊石)인지 호석(虎石)인지 구별마저 가지 않는 석물(石物)은 밭고랑에 팽개쳐졌다. 한데 이 자리가 진짜 명당이었을까? 명당이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헷갈리게 한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3년 3·4월호
작성일자
2013-04-1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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