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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언니, 우리 천 뜨러 가요, 진시장에.”

마트댁의 전통시장 나들이 ①

내용


 

일년, 아니 족히 몇 년은 된 이야기다.

결혼한 여자라면 누구나 누리는 ‘임신’이라는 행복이 나에겐 왜 그리 어려웠는지. 병원치료,  한약, 새벽 불공, 아들 가진 여인네들 비법 따라하기 등등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쯤. 어떡하다 ‘퀼트’에 손을 댔다. 마음의 평화가 있어야 뭔가가 생겨도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커다란 배를 자랑인 듯 드러내고 다니던 동네 한 아낙이 “퀼트 한 번 해보세요. 하다보면 애기 생각 안 나요. 나도 이거하면서 우리 장군이 가졌는걸?” 하며 내뱉은 말에 귀가 솔깃.

그날부로 아침에 눈떠 밤잠 들 때까지 짬 날 때마다 실과 천, 바늘을 꺼내들었다. 동네 아낙이 대충 그려준 도안이면 어떻고, 쓰다 남은 천이면 또 어떠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소망을 꿰고 또 풀었다.

‘자동차 키홀더’와 ‘명함지갑’을 시작으로, 조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 시어머니, 형님, 엄마 가방, 우리 아기 배넷저고리까지. 퀼트에 빠지고 나서부턴 하루하루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더라.  

“언니, 우리 이제 천 뜨러 가요, 진시장에.”

어느 날. 군말 없이 따라와 준 내가 기특(?)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천이 필요해서였는지  스승처럼 여기던 그 아낙이 진시장에 가잔다. 천 뜨러 가자고? 아, 드디어 나도 천을 뜨러 가는구나. 왠지 나도 ‘장인’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동안 들떠 있었지….

그렇게 진시장 가자고 몇 번이나 약속해 놓고선 몇 년이 지난 이제야, 그것도 혼자. 진시장 길에 나선다. 또각또각.
 

 

입구에 들어서니 ‘와~’. 칸칸이 오색 휘황찬란한 옷감들에 둘러싸여 고운 한복 차림으로 손님들

을 반기고 있는 상인들. 어찌된 일일까. 방금 전까지 추위에 웅크리며 종종 걸음치던 문 밖 사람들이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시장 1층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포목부 가게들.(상포목은 한복원단, 하포목은 그외 원단으로 나눈다) ‘화려하다’는 말밖엔 떠오르는 게 없다. 얇은 사 고운 자태가 어쩜 이렇게 색색이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기가 눌린다.

“참 이쁘지요? 진시장하면 ‘주단’ 아입니까. 많고 많은 천 중에 그래서 상포목이라고 부르지예. 부산사람들 결혼할 때 다 여기와서 한복 맞춘다꼬 보시면 됩니다.”

진시장서에서만 20년째 주단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호선씨가 비단결의 한복옷감들을 휙휙 풀어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한 때 진시장에 침체기가 있었지예. 한복 잘 안 해 입을 때도 있었고…. 정말 이래 시설이 좋아지고 깨끗하게 되기까지 상인들 노력 많이 했심니더. 시에서도 마이 도와주고예. 인자  여만큼 좋은 데가 어데 있습니까. 좋은 옷감에 바로 맞출 수도 있는데. 멀리서도 찾아오지예, 요즘은 쉬는 날이 없어예. 쉴 수가 없어. 예전보다 훨씬 더 잘된다고 봐야지예.”

유명 디자이너 한복 부럽지 않다. 마음에 드는 원단을 정하고 나면 몸에 맞춰 재단하는 가게까지 한번에 연결된다. 게다가 혼수 이불, 그릇, 폐백, 함 등등. 시장 한바퀴 돌기도 전에 이집 저집 소개해 준 덕에 결혼준비가 원스톱으로 진행된다.
 

“여보세요. 이모 여기 유자차 하나.”

정씨가 어딘가로 전화를 돌리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종이컵에 담긴 유자차 한잔이 도착했다. 하하. 말로만 듣던 진시장표 음료 배달 서비스다. 주단 집이 많아 선의의 경쟁, 악의의 경쟁 할 것 없이 치열하게 산다지만 그래도 매일 얼굴 마주보며 사는 사람들이라 정도 많다는 정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장상인들의 애환도 느껴진다. 한잔 달큰하게 마시고 일어선다.

지하 1층에 내려오니 이불, 솜, 그릇, 수예, 커튼, 신발, 폐백, 칠기 등을 파는 가게들이 대열을 지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종류가 많은 만큼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사연도 갖가지다. 누구는 시누한테 선물해야 할 일이 생겨 이 참에 기분 좋게 잠자리 들라며 이불 고르러 왔다고 하고, 누구는 알뜰살뜰 아껴살다 이제사 여유 생겨 그릇세트 장만하러 왔단다. 오랫동안 한참을 서서 작은 단추 하나하나 정성스레 고르는 사람도 있다.

2층에 올라가니 양복, 양장, 아기 옷, 잠옷, 운동복, 란제리, 가방, 벨트, 장갑, 모자, 양말 등등. 의류에서 잡화까지 없는 게 없다.

엄마는 엄마다(퀼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 나는 엄마가 됐다). 아기 옷만 들었다 놨다, 마트에서 산 내복보다 비싼 건 아닌지 중국산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 묻다 다시 제자리에 걸어놓는다. 역시 마트보다 싸다.

친정엄마에게 어울릴법한 개량한복도 들었다 놨다, 에이. 다음에 엄마 모시고 와야지. 지금은 갈 길이 멀다.

요즘 3층은 맞춤 양장으로 유명해졌다. 최고급 원단에 원하는 디자인을, 굳이 멀리 발품하지 않아도 세상에 하나뿐인 내 옷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게다가 맞춤 가격이 백화점 세일가 수준이다.

“이모, 이제 날 추운데 캐시미어로 해야지, 그래야 오래갑니다. 요즘은 이렇게 카라가 살짝 뾰죡하게 나와야 예쁩니다.”

가게 주인이 요즘 유행하는 코트 원단과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몇 가지 디자인을 제안한다. 집에 있는 코트가 어두운 색이니 좀 밝아도 나쁘진 않겠지. 다음에 오겠다며 가게를 나선다.

와~. 코너를 돌고 보니 3층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대의상 맞춤집들이 늘어서 있다. 번쩍번쩍, 알록달록. 스팽글이 들어있지 않으면 옷이 아니다. 이런 게 무대의상이구나. 전국에서 이 무대의상 때문에 진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제법 있단다.

터벅터벅. 이젠 발걸음이 무겁다. 물건 하나 사지도 않고 너무 열심히 구경만 했어. 좀 쉬어가자.
 

저 귀퉁이에 냉커피, 커피, 쥬스… 등등 메뉴판이 보인다. 쇼핑데이트 진시장이라. 여기서 목 좀 축여볼까.  

“아가씨, 뭐 드시겠어요? 시원한 냉커피?”

아가씨라니? 일단 접대 멘트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 분, 연세가 꽤나 있으신 분이시다. 살짝 귀띔해주시는 데 팔학년이시다.  

“영감도 없고 이제 나 혼자되니 어찌 이리 옛날 생각이 나는지 몰라. 예전에 우리 젊었을 때 시장 다니면서 데이트하고 그랬지. 아 그 때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이름 지었지. 젊은 사람들 여기서 물건도 사고 데이트도 하라고.”

벽에는 정을 나누는 대한민국 초코과자 **파이 상자에 들어있었다는 낡은 종이접이 작품들이 붙어 있다. 여기 터를 잡은 지 10년이 됐다니, 족히 십년은 더 된 듯하다.

“이것도 예전에 다 모아둔 걸 이뻐서 붙여놨어. 시간이 너무 잘 가. 난 여기 나와서 이렇게 아가씨 같은 사람들 만나서 즐겁게 얘기 하고 하루하루 보내는 게 아주 즐거워.”

할머님의 커피는 달작지근, 맛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할머님의 커피메이커인 흰색 보온병이 보인다. 아주 어렸을 적 집집마다 하나씩 있었던, 뚜껑을 꾹꾹 세게 누르면 뜨거운 물이 ‘푹푹’ 소리를 내면서 나오는 보온병. 할머님의 커피가게는 따끈한 추억을 팔고 있었다.

“인터넷에 쭈굴쭈굴한 할매 사진 올리면 안돼. 이쁜 사람들 사진 올려야지.”

그렇게 당부하셨지만 사진 찍는다 하니 포즈를 잡으시고 메뉴판 앞에 서신다. 괜찮다. 이제 진시장의 새로운 명물이 되실테니까.

그렇게 돌고나니 반나절이 금새 지나간다. 이 가게 저 가게 상인들 소개에 이끌려 한 바퀴 돌고 나니 이런. 퀼트 천 구경은 다음에 또 와야겠다.

어느 상인분 얘기처럼 진시장 구경하려면 하루도 모자라다. 혼수의 메카, 부산이 자랑하는 진시장. 1913년에 개장했으니 어느덧 100년을 맞이하는 시장이 된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걸 보면 그 이상이다.) 굳이 혼수가 아니라도, 한 눈 팔아 길을 잃어도, 진시장! 혼자 가도 재밌다. 강추다.

작성자
감현주(이미지 제공:부산관광컨벤션뷰로)
작성일자
2011-01-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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