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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들꽃들의 지조와 절개
부산이야기 2001년 11·12월호 2013-11-12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우리 권번(券番)에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말을 없애고 일본말을 국어로 강제 주입시키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실시하여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자 광란했다. 고유전통 지켜낸 동래권번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의 일본... -
밤엔 妓生, 낮엔 훌륭한 사회 사업
부산이야기 2001년 9·10월호 2013-11-12
동래온천의 명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동래온천의 기생들 가운데 특히 한동년(韓東年본명 한설양)은 영남지역의 풍류객이나 한량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동래 교방(敎坊:기생양성소) 기생 출신으로 기생조합 창설의 주인공이었다. 용모가 뛰어나게... -
사랑도 몰라요 성도 몰라
부산이야기 2001년 7·8월호 2013-11-12
기생은 늘 정기적인 교육으로 기예(技藝)를 갈고 다듬어야 했다. 전편에서 얘기한 예능실기(藝能實技)대회는 일종의 기예시험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당시 기생들이 직업인으로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수련과 관리를 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교육이 끝... -
서슬 퍼렇던 기생 서열
부산이야기 2001년 5·6월호 2013-11-12
동래 온천장은 한일합방이 된 1910년 말 부산진과 동래 사이를 잇는 경편철도(輕便鐵道 : 궤도가 좁고 몇 대의 객차가 딸린 일본형 기차) 부설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0년 경편철도 대신 전차가 운행되고 전기가 가설되면서 대규모 일본자본에 의해 이미 오늘의 형태에 가까운 근대적 온천지로서 골격이 짜여져 갔다. 전차 개설... -
동기(童妓)의 초야권(初夜權)
부산이야기 2001년 3·4월호 2013-11-12
지난 호에서는 동래기생이 본격적인 상업화에 들어선 내력과, 기생의 인기도에 따라 그들의 수입도 천차만별이었음을 밝혔다. 재색과 기예를 겸비한 기생은 자연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고 찾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수입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명창(名... -
본격적 상업화의 길 들어선 동래 권번
부산이야기 2001년 1·2월호 2013-11-12
관기제도(官妓制度)가 철폐되고 자유의 몸이 되었던 동래의 기생들이 생존을 위해 1910년 ‘동래기생조합’을 창설하였다. 1912년에 ‘동래기예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20년 다시 ‘동래권번(券番)’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시 전국 곳곳에 설립되어 있던 기생이나 창기조합의 명칭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권번’이란 교방(敎坊:기... -
갑오개혁으로 천년의 恨 풀어
부산이야기 2000년 11·12월호 2013-10-29
우리나라에 서구의 실용적이며 자유로운 문물과 사상이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기독교가 전파되고 실학(實學)이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겪는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 근대사상에 차츰 눈뜨게 된다. 고종(高宗) 연간(1864∼1907)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대외세력들 앞에 지금까지의 완고하고 폐쇄적인 빗장이 ... -
신라 왕들 번갈아 가며 즐겨 행차
부산이야기 2000년 9·10월호 2013-10-29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온천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온천을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명은 밝혀지지 않는다. 문헌상 가장 처음으로 지명이 밝혀진 우리나라의 온천이 바로 동래온천이다. 1281년 신라 신문왕(神文王)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