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터널, 자성로 지하도
사라진 도시의 철길을 따라 걷는, 부산의 기억 산책로
- 내용

좌천역에서 진시장 부근으로 돌아들어가면 붉은 벽돌 아치형 입구가 보인다.‘자성로 지하도. 사라진 부산의 도심철길.’
이 문구 하나만으로도 이곳이 단순한 지하 통로가 아니라 도시의 오래된 기억을 품은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하도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노란 벽이 맞이한다. 조명은 과하지 않게 은은하고, 벽면을 따라 놓인 사진과 전시물들이 하나의 시간표처럼 줄지어 있다.
벽면에는 1900년대 초 매축지의 풍경부터 2020년대 재개발 이후의 모습까지, 이 지역의 변화를 연대기처럼 정리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1900~1940년도 매축지의 탄생’, ‘1950년도 대화재’, ‘1980~1990년도 도심 속 섬으로 고립된 마을’, ‘2000년도 재개발 시도’, ‘2020년도 이후 현재의 매축지’라는 문구들이 시대별로 붙어 있어,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도시의 변화를 조용히 되새기게 만든다.
한쪽에는 1905년경 부산진시장 주변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초량의 언덕 아래, 초가집이 빽빽하게 늘어선 풍경은 지금의 부산과는 너무도 달랐다. 사진 속 좁은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그 시절의 공기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짧은 지하도를 빠져나오니 바로 옆에 비슷한 형태의 지하도가 하나 더 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가 벽에 그려져있는 듯 하다. ‘추억을 회상하며 기억을 되돌리는 그곳, 매축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지하도는 과거 도심을 관통하던 철길의 흔적 위에 조성된 길로, 단순히 걷는 공간을 넘어 부산의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은 문화 회랑이다.

통로 끝에는 말의 형상을 본뜬 조형물도 서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매축지 마을’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둔 전시물이다. 특히 이곳이 과거 군수물자와 말(馬)의 운송로로 쓰였던 흔적을 보여주며, 이름 그대로 ‘도심 철길의 기억’을 잇는 상징이 된다.짧은 구간이지만, 자성로 지하도를 걷는 일은 하나의 ‘도시 회상’이다. 발밑에는 과거의 선로가, 벽면에는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래된 도시와 새로운 부산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단순한 지하도가 아니라 ‘시간의 통로’라 부를 만했다.
잠시 멈춰 벽의 사진을 바라보는 동안 오래된 부산의 숨결이 조용히 귓가에 머문다.
도시의 소음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기억의 부산’이었다.
- 작성자
- 임주완
- 작성일자
- 2025-10-21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