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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구포왜성 일대 지명의 유래와 전설

내용
구포왜성 일대 사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는 일제강점기 때 의성(義城) 혹은 의성대(義城臺)라고 불렸다. 구포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구포왜성’을 의성(義城)이라 부른다. 야산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의성산(義城山)이라고도 부른다. 정상에 서면 금정산, 상학산(上鶴山), 백양산(白楊山)의 경관과 낙동강의 물줄기가 흘러가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의성대라고 지칭했다.

의성대 사진

의성(義城)이란 지명은 또다른 의미도 내포한다. 이곳은 옛날 김해만의 동쪽 접안지역이었고 후에 강 하구에 하중도(河中島)가 형성되면서 세 갈래 물길이 갈라져 흐르는 강 동쪽 요새지로써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시대 때 이곳에 황룡(黃龍)이란 장군이 5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의성대 사진02

낙동강 하구지역에서 해적 짓을 일삼던 왜구들이 법흥왕 때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대규모로 쳐들어 왔다.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 성을 먼저 점령하기 위하여 왜구들이 집중공략을 해왔다고 한다. 왜구들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정상에 올랐을 때 신라의 장군과 군사들 500명이 몰사하면서까지 끝까지 항쟁하는 것을 보고 비록 싸움에는 이겼으나 호국충절이 넘치는 신라 군사들의 모습에 기가 꺾여 왜구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한다.

학사대 사진02

수정마을에서 서쪽으로 가면 용당 마을로 들어서고 학성산(鶴成山)이 솟아 있었다. 이 산 정상부가 학사대(鶴士臺)로, 바위에 학사대 대명과 경관을 뜻하는 ‘일심추월 사면춘풍一心秋月 四面春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의성산의 의성대를 중심으로 안가산의 조대, 학성산의 학사대는 이 고장의 삼대(三臺)로 꼽을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었다.

 구룡사(龜龍寺) 절 입구 사진

구룡사와 용왕샘 의성 성터 남쪽에 구룡사(龜龍寺) 절이 있다. 구룡사는 가락국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의성산을 배산으로 용왕샘이라는 샘터가 있다. 절터로써 명당자리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샘터에서 용이 의성산 쪽으로 솟아올라 승천하면서 산 정산까지 굴이 뚫렸다고 한다, 이 굴 안에서 물이 항상 흘러 내렸다 한다. 그 샘터도 1970년대 사찰 앞을 가로질러 남해안고속도로를 개설하면서 의성 큰 산과 작은 산이 갈라진 후 물이 점차 줄어들었고, 현재는 샘터가 사라져 버렸다.

서생포왜성, 웅천왜성 등 사진

임진왜란 시기 이 땅에 축성된 많은 왜성들은 그간 뜯기고 방치되어 허물어지는 등 대부분이 흔적들만 남기고 있지만 서생포왜성, 웅천왜성 등 몇 곳의 왜성들은 아직도 왜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물론 그 간 국가사적에서 지자체 단위 관리 기념물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훼손되기도 했었지만, 굳이 ‘역사교육의 장’을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왜성은 국난 극복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유적 사진

전란의 불행한 현장에 그치지 않고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주요 유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사회의 역량이 많다는 방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왜성 역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와 함께 왜성은 16세기 이후 한일 간 축성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임란 이후 조선은 성곽 축성 때 성벽의 각도를 종전의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했다. 왜성의 축조방식을 빌려 온 것이다. 수직으로 쌓는 것보다 튼튼하고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다.

남한산성 사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된 남한산성(사적 57호)이 그런 사례다. 세계유산위원회는 ‘17세기 초 비상 시 임시수도로써 당시 일본 중국의 산성축성기술을 반영’했다는 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사유 중 하나로 들었다. 일본 본토에서도 임란 이후 쌓은 조선의 읍성에서 보이는 성벽의 사각형(ㄷ자형) 돌출구조물(치, 稚)을 만들었다. 이는 성벽에 오르는 적을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다.

왜성 사진

일본의 성곽연구자들이 왜성을 답사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16세기 말 한반도 남해안에 왜성을 쌓던 시기에 지은 일본 본토의 성곽 중 지진과 오랜 전란 등을 거치면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성이 몇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왜성은 한일교류사를 풀어낼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작성자
황복원
작성일자
2019-08-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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