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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708호 기획연재

부산 역사 흔적 찾아가는 버스 여행

시내버스로 만나는 부산 ⑫ 110-1번 버스

내용

어느새 무르익던 가을이 가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찻길가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은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부산의 겨울바람은 스산하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사람 가슴 속까지 시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다 보면, 세상사 시름도 잊고 마음 속 찌꺼기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이번 '시내버스로 만나는 부산'은 가야동에서 서면~연산동~동래를 거쳐 온천장까지 운행하는 '110-1번' 버스를 타고 부산을 만나본다. 그중에서도 겨울의 명소 온천장을 중심으로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안의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과 동래향교, 장관청, 송공단, 동래부 동헌 등을 소개한다.

동래온천노천족탕.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강온천 '동래온천'

아∼ 따뜻하다. 무릎까지 걷어 올린 다리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온 몸으로 퍼져오는 온기가 초겨울의 쌀쌀함을 덮어준다. 그리고는 뒤이어 퍼져오는 이 뜨거운 쾌감! 기분 좋은 절정이다.

온천장 '동래온천 노천족탕.' 가을의 금정산을 오르내리다 늦은 걸음에 하산한 저물녘. 온천족탕에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부린다. 꽉 조였던 등산화 끈도 풀고, 양말도 시원스레 벗어던진다. 발이 갑자기 자유롭다. 마음마저 훌훌 자유롭다.

콸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온천물이 노천족탕을 여유롭게 한 바퀴 돈다. 원탕에서 가열 없이 직접 공급되는 온천물이다. 그 사이사이로 하산한 등산객과 마실 나온 할머니…, 남녀노소가 둘러앉아 족욕을 하고 있다. 모두들 느긋한 모습이다. 이곳에서만큼은 세상사 희로애락이 부질없는 듯하다. 바야흐로 '노천 족욕'의 무아지경인 셈이다.

'동래온천.' 일명 온천장. 우리나라 온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온천이다. 신라시대 때 '신들의 온천'이라 하여 신정(神井)으로 불렸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충원공이라는 재상이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욕사(浴舍·목욕시설)를 짓고 온천으로 개발된 동래온천은 1910년 일본인에 의해 근대적인 온천으로 본격 개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천 나라' 일본인들도 즐겨 찾는 온천이었다. 그만큼 물이 좋다는 뜻일 게다.

약알칼리성 식염천 … 신경통·관절염에 효과 탁월

온천장에서 제일 유명한 온천엘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대욕탕에서 온천을 즐기고 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온천에 들어간다. 뜨거운 물에 천천히 몸을 담그자 살결이 짜릿짜릿하다. 눈을 감고 온천물을 만끽한다.

좋다∼ 참 좋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모든 근육이 풀리고 뼈마디가 자근자근 기분 좋게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머릿속은 하얗게 아무 생각 없이 무장해제 중이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마구 든다.

동래온천은 약알칼리성 식염천이다. 때문에 온천수를 마시면 만성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또한 류머티즘, 신경통, 관절염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고, 말초혈액순환 장애와 피로회복 등에도 효험이 있는 건강온천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래온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동래 고을에 다리가 불편한 노파가 한 명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 근처 샘에 학이 한 마리 날아와서 다리를 절룩이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사흘째 되던 날 학의 다리가 나아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노파가 학이 머물던 자리에 가보니 샘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데, 그 샘물에 며칠 동안 다리를 담그고 있으니 다리가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이곳을 사람들이 온천이라고 불렀다."라고 전하고 있다.

때문에 온천장에 가면 하루를 제대로 투자한 느낌이 든다. 건강을 챙기며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온천장의 밤은 푸근하다. 기분 좋은 피곤함이 몰려온다. 오늘 밤은 꿀맛 같은 다디단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있는 역사 체험장,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안에는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이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역사전시관이다. 당시 이 수안역 부근은 동래읍성의 해자(垓子)가 있던 자리. 해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 혹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을 말한다.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에 자리한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는 역사전시관이다.

그 해자에서 다량의 인골이 발굴됐다. 80∼110여구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 발굴됐다. 이것은 모두 같은 시기에 해자에 버려져 방치됐다는 얘기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칼에 베이고, 조총과 둔기에 두개골이 뚫리고 함몰된 상태로 살해됐다. 그중 왜군 조총에 살해된 5세 남짓한 유아의 인골도 있었다. 20대 여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에는 머리를 두 번이나 무참하게 칼에 베인 흔적이 있었다. 2005년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사 예정지 발굴 현장에서였다. 하여 그 시절의 역사를 새기고자 이곳에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을 세운 것이다.

전시관은 주 전시, 기획전시, 해자 단면 연출, 전사 그래픽 연출 등 크게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됐다. 주 전시공간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 외도 큰칼, 창 등 출토유물 다수가 전시되고 있다.

동래 역사 간직한 동래읍성 유적지

동래구청에서 언덕배기를 조금 오르다보면 '동래향교'가 나온다. 동래향교는 조선 태조 1년인 1392년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다. 향교 안에는 서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聖殿)이 있으며, 서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도 명륜당 앞에 배치돼 있다.

동래시장 뒤편에 자리한 '송공단'은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선열들을 모신 제단이다.

처음 세울 당시에는 지금의 동래고등학교 자리인 읍성 동쪽문 밖에 있었으나, 후에 여러 차례 옮겨 다니다 순조 12년 18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6호다.

장관청(將官廳)으로 향한다. 동래부 동헌에 부속된 많은 건물 중 동래지방 군사장교들의 집무처가 바로 장관청이다. 일제강점기 때 유리문을 달고 구조를 약간 변경했지만 그런대로 조선 후기 관아 건물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현재 동래기영회(耆英會)에서 사용하고 있다.

동래읍성 북문광장에 자리한 '장영실 과학동산' 에는 혼천의, 측우기 등 발명품 20여점이 전시돼 있다.

동래시장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시장 뒤편으로 송공단(宋公壇)이 보인다.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선열들을 모신 제단이다. 중앙으로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비롯해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 등과 유생, 비장 및 무명전망자(戰亡者) 등이 모셔져 있다. 특히 송상현 공의 애첩 '김섬'과 동래성 여인들의 제향공간도 따로 마련해 둔 것이 눈길을 끈다. 부산시 기념물 제11호.

동래읍성에서 내려다 본 복천동 고분군 모습.

동래향교는 조선시대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다. 향교 안에는 서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聖殿), 서생들이 생활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망미루 … 동래부 동헌 옆 이전 자기 자리 찾아

동래시장 앞에 있는 동래부 동헌으로 향한다.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공무를 보던 곳.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동래시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호.

큰 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충신당(忠信堂)과 동익랑(東翼廊) 등 2동의 건물이 서 있다. 한때 동헌을 중심으로 동래부사의 주거공간인 서헌과 수십 개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유실됐다.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공무를 보던 곳으로 아헌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동헌에 부속된 관아건물은 행랑채, 정원루, 객사, 실무 아전들과 군관들의 집무처, 관노 하인들의 집, 조세창고, 다모방, 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존 건물 크기만 보아도 당시 관아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최근에는 일제에 의해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졌던 망미루가 동헌 옆으로 이전·복구돼, 부산을 사랑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 동래시장 입구에 북을 달아 동래성 4대문의 개폐를 알리던 '망미루(望美樓)'였기에 제자리 부근으로 온 것이 더욱 기꺼운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망미루 앞에서 동래주민들과 동래시장 장꾼들이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때문에 원래 망미루가 있던 지금 동래시장 입구거리가 '만세거리'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춥다고 움츠리지 말고 시내버스로 어슬렁어슬렁 동래의 역사도 찾아보고, 저물녘 동래온천에서 뜨끈뜨끈하게 몸 한 번 담가 보시라. 건강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
글 최원준 시인
작성일자
2015-12-0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708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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