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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용두산공원의 단상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 최우수상

내용

내가 자란 시골집은 옆집과 대문도 없었다. 두 지붕 한 가족으로 살았다. 중간에 토담도 치지 않고 가림 막이라곤 마당귀의 돌배나무에 기댄 짚누리가 고작이었다. 옆집에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은희가 살았다. 무남독녀인 은희는 예쁜 얼굴이지만 사팔눈을 가졌다. 더구나 아버지를 잘못 만나 사팔뜨기에 노름쟁이 딸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다녔다. 친구들의 놀림이 싫은 은희는 나와 늘 소꿉장난을 하며 정이 도타운 오누이처럼 지냈다. 돌 위에 사금파리와 감또개로 반드깨미 살림을 차려놓고 “오빠는 신랑, 나는 색시”라며 까르르 웃는 그녀는 참으로 귀여웠다. 철이 들어 가시버시 소꿉질이 싱거워진 무렵부터는 쇠꼴을 뜯거나 땔감을 주우러 눈만 뜨면 해종일 함께 산야를 헤매고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늦여름 어느 날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가던 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내 집은 대문간이 없어 형님밖에 매수할 사람이 없소, 이쯤 해서 얼릉 도장 찍고 성애술이나 먹읍시다.”

텁텁한 목소리는 은희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물려받은 전답을 모두 노름판에 날리고 달랑 남은 집 한 채마저 우리 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은희와 물 억새가 일렁이는 실개천 둑길을 걸었다.

“오빠! 우리 집 주말에 이사 간다.”
“그래, 낮에 술 심부름하며 어른들 얘기 들었어, 멀리 가남?”
“부산으로 간데, 난 정말 가기 싫은데”

청도에서 부산은 멀지만 당시 토지가 없는 빈자들이 막노동의 벌이터가 좋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나는 곳이었다. 빈손에 낯설고 물선 도시로 떠나는 은희가 불쌍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서로 편지 자주하자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용두산공원 근처로 이사 간 은희는 자신의 근황과 함께 공원의 호탕한 풍광을 자주 편지로 전해왔다. 그해 가을 용두산공원에 수학여행을 간 나는 공원구경은 뒷전이고 근처에 있을 은희가 보고 싶어 혼자서 가슴앓이 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오빠! 잘 있지? 나는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어 노점 하시는 엄마를 돕고 있어, 그리고 아빠가 또 화투판에 전세금마저 날려 곧 방을 빼줘야 한데, 이사 가서 다시 편지 할 테니 그때까지 오빠 안녕.”

그 후 다시는 은희 편지를 받지 못했다. 내가 편지를 해도 수취인 불명이다. 그렇게 우리의 유년시절의 추억은 세월 속에 묻혔다.

몇 년 뒤 세밑에 삼촌이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다. “형님! 물방우(水岩)소식 압니까? 노름으로 살림 몽땅 털어먹고 부산의 무슨 여관에서 죽었는데 가족들이 거둘 형편이 못되어 나라에서 장사 쳤답니다.” 내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은희 아버지 소식이었다.

그 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 나의 공직생활의 끝이 보일 무렵 순환근무라는 명목으로 대구에서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은희가 향수를 달래던 용두산공원을 찾았다. 그녀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나의 눈길은 사시안의 중년여인을 규색(窺索)하고 있었다. 바다를 훑고 올라온 칼 바람도 잊고 벤치에 앉아 늙을 줄 모르는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심성이 고운 은희가 행복하게 살고 있기만을 진심으로 빌었다.

첫눈이 살포시 내리던 날, 퇴근을 준비하다가 뜬금없이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오빠! 나 알겠어요? 옆집에 살던 은희” 허기진 기다림 끝에 꿈 같이 그녀를 다시 만났다. 반 백년의 찌든 세월이 밑 절미가 고운 그녀 얼굴에 엷은 나이테를 그려 놓았다. 그 옛날 순수해 아름다웠던 여린 기억들이 빗방울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빠! 나 참으로 나쁜 여자지? 편지 약속도 저버리고, 내 삶이 창피해서 연락은 못했지만 정말 오빠가 보고 싶었어.”

한줌허리에 바짝 마른 그녀의 눈시울에 이슬이 맺혔다. 결혼에 실패하고 자폐증을 앓고 있는 딸 ‘민지’와 녹록지 않은 살림을 꾸리고 있다고 한다. 민지 걱정에 그녀 자신의 몸은 챙길 겨를이 없다. 민지는 겨우 휠체어만 타지 않는 건강만 허락 받았다. 시집 갈 나이가 훌쩍 지났건만 평생 유치원생이다. 이런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속은 오죽하랴!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는 눈꽃이 피지 않아도 아름다운 용두산공원에 올랐다. 따스한 봄볕이 쏟아지는 오후 한나절, 그녀와 나는 민지의 손을 꼭 쥐고 야경까지 꼼꼼히 둘러볼 요량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용두산은 왜구들을 콱 삼켜버릴 기상의 용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한 때 울창한 곰솔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으로 불린 적도 있다. 해발69m에 불과하나 부산의 심장에 자리하여 시가지를 한 눈에 담아낼 수 있는 빼어난 경승지다. 잘 간직된 부산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평생 공원을 끼고 사는 은희의 고향인 셈이다. 옛날 공원을 오르던 194계단자리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걷기가 불편한 민지는 신이 났다. 자동계단에서 내리자 미술거리의 작은 나무집이 우리를 맞는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연상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지 얼굴을 기꺼이 그려주는 미래의 화가들이 고맙다. 공원에 오르자 봄꽃으로 단장한 꽃 시계가 세월을 삼키고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초침이 저무는 내 인생의 속도감으로 다가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꽃의 화려함에 은희도 속절없이 흘러간 청춘이 아쉬운지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花無十日紅 人不百日好)’라고 혼자 중얼중얼 되 뇌이더니.

“오빠! 애옥살이에 나만 늙었지? 그래도 오빠를 다시 만나 행복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회한인지 행복인지 모를 야릇한 미소가 어렸다. 종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10만여 부산시민들의 태양빛으로 연꽃처럼 피어난 대종은 오는 제야에도 여지없이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 여운으로 부산의 새해를 열고 민지 모녀의 소원을 염원해 줄 것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의 관문에 왜놈들이 첫발을 디딘 굴욕감이 치밀어 통한의 부산포를 노리는 충무공동상 앞에서 풀어진 조국애를 다잡고, 광장 테두리의 포토존에서 모녀의 건강을 기원하는 나만의 소원을 적어 사랑의 자물쇠로 채웠다. 부산타워로 가는 길목에 벤치에 홀로 앉은 부산시 홍보대사님! 유명한 여배우 미녀모델을 만났다. 민지 모녀가 뒤질세라 녹빈홍안을 내밀고 미래의 추억하나를 사진으로 남겼다.

용두산공원의 마루지로 120m의 웅혼한 위용을 가진 부산타워가 우리를 유혹했다. 불국사 다보탑의 우아함에다 등대모양의 창조미를 보태어 빚어놓은 전망대에 올랐다. 부산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발 아래 서 움직인다. 부산항의 아름다운 미모가 가슴에 녹아들고 추억의 영도다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1966년까지 다릿발이 끄떡끄떡 하늘로 치솟아 구름떼처럼 몰려온 구경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영도다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아쉽다. 환생한다지만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지 마음이 편치 않다. 이산의 한이 서린 영도다리의 눈물담을 민지에게 들려줬는데 알아들었는지 마냥 웃음만 흘린다. 아마 가슴으로 들었을 것이다. 어둑발이 몰고 온 야경은 황홀함을 넘어 일대 장관이다. 밤의 정취까지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부산을 다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 기다림 끝에 짧은 만남이 주는 아쉬움은 그리움을 제치고 너무도 빨리 이별의 눈물이 되어 흘렀다. 은희랑 재회의 기쁨은 두 해를 못 넘기고 춘몽 같은 찰나로 끝이 났다. 통곡도 못하는 딸 민지를 남겨두고 그녀는 진한 포곡성을 들으며 불귀의 객이 되어 훌쩍 먼 길을 떠났다. 화려한 치장으로 떠나는 낙엽처럼 고운 모습의 잔영만 남긴 채…

그녀의 49제가 끝날 즈음, 내게도 부산을 떠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민지를 시설에 맡기던 날. 굽은 손으로 내 가슴팍을 할퀴며 온 몸으로 울던 모습이 지금도 내 코끝이 맵도록 아련하다.

가슴까지 촉촉이 눈물 맺히게 하는 이슬 같은 벗! 그녀가 잠들어 있고, 언제나 천사의 얼굴을 한 민지가 살고 있는 부산을 잊을 수가 없다. 소슬바람을 맞아 갈대가 스적대는 이 계절에 용두산공원에 오롯이 묻어나는 내 가슴 저린 애달픈 추억을 곱씹어본다.

작성자
변재영
작성일자
2013-11-26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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