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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박차정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1910년에 태어났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朴日馨)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피체된 그녀는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그녀는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이청천(李靑天)의 처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단합시켰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그녀는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궐기를 촉구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광복 후 그녀의 유해는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차정 의사 기념사업회인 숭모회에서 금정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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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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