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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김병태

부산 동구 좌천동(이명:斌·彬·曺國棟)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좌천동 서당 육영재(育嬰齋)를 다녔다.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일제의 관공서 파괴 및 일본 고위관리의 암살 처단을 목적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자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원봉과 협의한 후 동 단원 박재혁(朴載赫)을 국내로 밀파,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전개하여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적극 관여하였다. 또한 1928년 중국 상해에서 김원봉과 함께 침체의 늪에 빠진 의열단을 정비하고자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활동방향을 재정립하였다.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의 의열단에서는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장개석(蔣介石)의 원조로 김원봉은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김원봉과 함께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투쟁 사관생도를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의열단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유일당 건설을 결정하였다. 1935년 7월 모든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이 총 결집하여 유일당으로 건설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자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가 창설되자 광복군에 지원하여 활동하였으며, 1945년 3월 왕영재(王英哉) 등과 함께 인도(印度) 파견공작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김원봉이 귀국하여 1946년 8월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자 중국 상해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다가 중국 남경에서 병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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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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