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역사

부산항일학생의거 터

부산항일학생의거 터

이곳은 1940년 11월 23일 부산항일학생의거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후 국민총동원령(1938), 국민징용령(1939), 학도지원병제(1941)에 이어 1944년에는 강제징병제를 실시하는 등 한국에 대한 군사적 억압과 대륙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ㆍ물적자원의 수탈을 강행하였다.

1940년 11월 21ㆍ 22일, 일제는 전력증강의 일환으로 경남학도연합 군사연습 모의 전투훈련을 일본군 육군대좌 노다이(乃台兼治)의 총지휘 아래 실시하고, 11월 25일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 : 현 동래고)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동래중학과 부산2상(현 개성고) 학생들이 항의하였으나 번번이 묵살당하여 대회장에는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하오5시경, 폐회식 때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항일의거 시발의 신호탄이 되어 6시경, 두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1,000여 명이 시가행진과 노다이 관사 습격을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금지곡이던 우리 민요를 부르면서 보수동 네거리에 이르러 대열을 나누어 대청동과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시가행진을 계속하였다. 7시경, 4ㆍ5학년생 400여명이 재집결하여 영주동 노다이 관사에 도착하니,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돌을 던져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밤 10시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1월 24일 두 학교는 일본경찰의 취조장이 되어, 매일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일경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이 투옥되고,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 징계를 당했다. 특히, 일경의 고문으로 출옥 후 고문의 휴유증으로 순국한 분들도 있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는 당시 일제의 삼엄한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최대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부산지역 항일학생운동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에 그 숭고한 뜻을 새겨 시민정신의 큰 뿌리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대신동 전차종점 터

이 자리(서구 동대신동 3가 173번지 구덕운동장 건널목 맞은편)는 부산의 근대화기 50년 동안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어 추억과 애환이 깃들어 있는 전차종점이 있었던 곳이다.

부산에서는 1910년에 부산진~동래온천장 구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 1928년엔 부산공설운동장이 조성됨에 따라 대신동까지 전차선로가 연장되어 이곳에 전차종점이 들어섰다. 당시 운행구간은 운동장 ~ 시청 앞 ~ 부산진역앞 ~ 서면을 지나 동래온천장으로 가는 선로와 운동장 ~ 충무동 ~ 시청앞에서 영도 남항동 종점으로 가는 2개의 선로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전차를 「번갯불을 잡아서 타고 다닌다」고 해서 구경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대중교통 수단이 점차 버스로 전환되면서 1968년 5월 20일 전차운행이 중단되었고 그 때 운행되던 전차 1량이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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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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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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