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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전투

부산진성 전투

부산진성(釜山鎭城)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대에 있었다. 지금의 정공단 외삼문 위치가 부산진성의 남문터가 된다. 부산진성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장군을 위시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초 격전지이다.

부산진성 전투(釜山鎭城 戰鬪)는 1592년 4월 13일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군인 제1군 (18,700명, 병선 700여척)과 맞서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지방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인 부산포진·다대포진·가덕진·미조항진 등 4개의 진(鎭) 가운데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으로서 왜군들이 조선에 상륙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이었다.

그리고 부산포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부산포왜관(1407~1592)이 있어서 다수의 왜인들의 제한적인 출입이 유일하게 허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왜관에 체류하였던 다수의 일본인들은 대마도 출신으로 이들이 왜군에 차출되어 부산의 지리에 익숙했다. 한편,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民戶)는 300여호로 군민을 합하여도 적의 대군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실제 병력은 불과 1,000여명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공격에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였으나, 왜군들의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假道)를 요구하였으나, 정발 장군은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는 등 전투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발 장군을 위시한 부산진의 군·관·민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적을 맞아 최초로 치른 전투로서 군사의 수와 무기 면에서 왜적과 비교하여 현저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군·관·민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산시에서는 1977년 3월 25일 부산진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하신 정발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동상을 세웠다. 관련 유적으로는 정공단(시 기념물 제10호), 부산진성터, 부산진지성(시 기념물 제7호), 부산진순절도(보물 제391호, 육군사관학교 소장)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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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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