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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별장

동래별장

동래별장(東萊別莊)은 동래구 온천1동 126-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래별장은 일제강점기 부산 제일의 땅부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박간별장(迫間別莊)으로 박간탕원(迫間湯源)이라 불렀다. 동래별장은 1912년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8월 옛 별장 옆에 새 별장을 완공해 입주하였는데, 10만원의 자금을 투자하여 금정산의 송림으로 정원을 꾸미고, 많은 돌을 사용해 연못을 만들었다. 1929년과 1935년에는 일본 천황족이 머물렀는데, 이들을 위해 독자적인 탕원(湯源)을 조성하였고, 하자마탕원(迫間湯源)이라 불렀다. 지금도 남아 있는 금정산 돌을 재료로 한 욕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자마는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 경상남도회부의장, 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고, 부산토지주식회사 사장, 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좌지우지하였다. 하자마는 1880년 5월 부산 개항 직후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그는 1850년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오사카시(大阪市) 오백정장(五白井長) 상점의 부산지점 지배인으로 부산에 왔다.

1899년 독립하여 5년후 부산에 본점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마산·청진 등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18년에는 부산부 동광동에 박간총본점겸 주택 2층짜리를 세우는 등 그는 특히 토지와 가옥 등을 수매, 굴지의 부동산업자가 되어 부산 제일의 재벌이 되었다. 그는 부산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는 경남지역에도 25,740,000㎡ 의 토지를 소유하여 도내 소작지의 3.5%를 차지할 정도였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9월에는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면서 박간별장(迫間別莊)에는 경상남도 양산·밀양·울산 등지를 관할하는 경상남도 제3지구 미군정청이 자리하면서 군정사무를 보게되었다. 인근에 있었던 지금의 농심호텔 자리에는 미군 G-2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동래별장"으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동래별장은 아름다운 경승지인 금정산 자락에 9,900여㎡의 자리를 잡아 별장을 지었다. 별장은 정원을 가꾼 담장이 높다. 담장을 높이 쌓은 이유는 주변의 좋은 경치를 별장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도이다.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역시 일본양식인데 지금도 남아 있다. 높은 담장 안에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금정산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이곳을 흐르게 하였다.

동래별장은 본관 목조 2층 건물의 660여㎡ 규모와 별채, 정자, 석탑, 석등, 부도 등을 세우고 마당에 모래를 깔아 인공장식을 만들었다. 연못 옆에는 높이 1.5m인 3층석탑이, 신관 앞에는 10m인 13층 일본식 양식의 석탑이 서있다. 이 석탑은 기단 하부가 3단으로 구성되고 옥개석이 13층으로 쌓아 올린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일본형의 목발이 동서남북에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원을 양각하고 그 위에 보주를 꽂아 놓았다. 기단부 아래에는 시멘트로 가려져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동래별장 입구 오른쪽과 왼쪽에는 일본형 석등 4기가 세워져 있으며, 석등의 몸체에 음각 된 무늬가 특이하고 지붕모양이 뽀족하여 마치 병사의 투구를 연상케 하며 일부는 일본식 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동래별장은 1965년 고급요정으로 영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을 찾은 국빈급 인사는 물론 군사정부시절 부산에 온 대통령도 들렸을 만큼 관광 명소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천장의 쇠락과 더불어 휴·폐업을 거듭 해오다가 1997년 11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지 3년만인 2000년 10월 고급요정에서 전통 국악공연을 보면서 호텔급 수준의 전통 한정식을 제공하는 관광음식점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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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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