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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

부산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인 7월 24일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釜山巨堤里捕虜收容所, 지금의 연제구 연산5동 1000번지 부산광역시청, 부산지방경찰청이 자리 잡고 있는 일대)를 설치하였다. 이 시설은 유엔군사령부 관할하에 미 제8군사령부가 운영하였다. 이 시설은 7월 26일부로 "주한 미8군사령부 제1포로수용소(Camp EUSAK No1)"라 명명되었으며, 통상 "제1포로수용소(POW Enclosure)"라고 불리어졌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 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고 아군의 반격으로 붙잡히는 포로의 엄청난 증가로 8월 2,000명에서, 9월에는 11,000명에 육박하였다. 계속 증가하는 포로의 관리를 위해 9월에 "인천 임시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0월 2일 서울 마포형무소에도 포로수집소가 설치되었으나, 이들 임시 포로수용소, 포로수집소를 거친 포로들은 전부 부산 포로수용소로 집결되었다. 9월 하순부터는 포로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자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는 철조망이 더 많이 설치되면서 "제2~6포로수용소"까지 증설되었다.

1950년 10월말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붙잡힌 포로의 계속적인 증가로 그 숫자가 117,000여명에 육박하였다. 이러한 포로의 증가는 수용 및 관리 능력을 초과하게 되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미군 제8군사령부에서는 제2군수사령부(2nd Logistical Command)를 창설하여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보충하고 병참문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1950년 10월 25일 이를 지원할 제31, 32, 33포로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계속되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해 포로들의 지속적인 증가와 10월 25일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중공군 포로까지 늘어나자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0월 28일에는 평양에 2개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향후 안정적인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1월 27일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가 확정되었고, 12월 4일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천 포로수용소를 확장하였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가 제6포로수용소까지 확장하였으나 계속 늘어나는 포로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12월 중순경에는 "수영 대밭 제1~제3포로수용소(수영구 광안4동 옛 인쇄창 또는 옛 수영비행장으로 추정)"와 "가야 제1~3포로수용소(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음)"를 증설하게 되었다. 이들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의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의 지소인 셈이다. 1951년 2월초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공사를 시작하여 2월말 경에는 거의 마무리와 함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기 시작하여 50,000여명이 거제도로 옮겨졌다.

동년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경비대대 등 관련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포로의 이동이 계속되어 3월말까지 이송된 포로는 숫자는 약 100,000명에 이르렀다. 6월말 경에는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포로들의 이송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이 140,000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에는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전방에서 붙잡힌 포로가 부산으로 모이고, 그 인원이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잠시 머무는 보조적인 위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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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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