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4기 열린 강좌(강원국 전북대학교 교수)

날짜
2018-07-18 14: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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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로 행복하기' 강원국 교수 특강

주 제 : 말과 글로 행복하기
강 사 : 강원국 전북대학교 초빙교수
날 짜 : 2018-05-30
장 소 : 부산광역시 인재개발원 대강당

Ⅰ. 행복하기 위해 쓴다

행복한 삶이란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었을 때? 갖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여자 친구, 남자 친구와 사귈 때? 물론 이런 때, 기분 좋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게 있다. 쾌락과 행복이다. 둘이 자주 헷갈린다.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다.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이다. 본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 뇌의 저 안쪽에 있는 뇌간이 관여하는 ‘느낌’이다. 뇌간은 파충류의 뇌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최초로 갖고 있던 뇌다. 그것에서부터 뇌가 진화해온 거다. 누구나 파충류의 뇌를 아직도 갖고 있다. 식욕, 성욕 등등을 관장한다. 동물도 갖고 있다. 쾌락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동일하게 느낀다. 그러나 지속성이 없다. 순간적이다. 먹을 때만 즐겁다. 잠깐 행복할 뿐이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욕구다.

행복감은 인간만 느낀다. 어떤 느낌일까? 만족감이다. 물론 식욕, 성욕 등 기본 욕구는 충족이 되어야 행복하다. 굶어죽을 지경에 있으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쾌락만으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성취와 인정이다. 무엇인가를 이뤄내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행복하다.

성취할 때 행복
오락게임이 재밌는 이유는 이뤄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짜릿함 뒤에 성취감이 있다. 올라가는 단계가 없는 게임은 없다. 레벨이 없으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을 사귀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배후에는 상대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성취감이 자리하고 있다. 이성과 오래 교제하다 보면 시들해지는 이유는 이미 성취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은 탁월함(Arete)의 추구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탁월함에는 지적 탁월함(Theoria)과 성격적 탁월함(Praxis)이 있는데, 지적 탁월함, 즉 지혜, 통찰 같은 것은 배움에서 생기고, 성격적 탁월함, 즉 관용, 절제 같은 덕스러운 품성은 습관으로부터 얻어진다고 했다.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도 서로에게 유용함과 즐거움을 줄 때 보다 서로의 탁월함을 주고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 이 모두가 성취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한 스피노자. 그 역시 인간은 누구나 자신 보존 본능이 있다고 했다.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나 힘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했다. 코나투스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를 갖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노력을 욕망이라고 했다. 성취욕이다. 이런 욕망은 없애지 못하며, 다만 조절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감정이 아닌 이성을 통해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시킬 때 인간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모르던 것을 알고, 분명하지 않던 것을 명확하게 깨우치고, 그럼으로써 내 안이 채워지고, 그것이 자신을 키우고 충만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코나투스다.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는 코나투스를 증가시킨다.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인정받을 때 행복
사람은 또한,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행복하다. 비범한 사람은 성취만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누구에게나 인정욕구가 있다.

요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많이 한다. 짤막한 글쓰기를 즐겨한다.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왜 그럴까.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2012년 미국 하버드대 다이애나 타미르와 제이슨 미첼이 100명의 뇌를 관찰했다. 그랬더니 자기 이야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음식을 먹거나 돈이 생겼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일치했다. 자기를 표현하고 글을 쓰는 일이 밥 먹는 것과 같은 쾌감과 만족을 주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고 번듯한 직장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인정욕구와 무관하지 않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자기 안에는 두 사람의 내가 존재하는데, 나 스스로 이렇다고 생각하는 ‘나’(I, 주체적인 나)가 있고, 남들이 이렇다고 하는 ‘나’(Me, 객체화된 나)가 있다. 객체화된 ‘나’는 주체인 ‘나’에 항상 못 미친다. 나 스스로 평가하는 내가, 남들이 보는 ‘나’보다 늘 우월하다는 의미다. 남이 생각하는 ‘나’와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사람은 노력한다. 남들이 보는 ‘나’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힘쓴다. 이를 ‘인정투쟁’이라고 한다. 쉽게 얘기하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호네트는 인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는 인정이다. 이는 사랑을 기반으로 하며, 이런 인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다. 이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고립감과 소외감을 느낀다. 두 번째는 평등한 대접과 같이 사회에서 받는 인정이다. 이는 권리를 기반으로 하며, 이런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느낀다. 이것이 충족되지 못할 때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다. 연대에 기반하며, 이를 통해 자긍심을 느낀다. 연대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가치를 부여하게 한다. 이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사람은 굴욕감과 분노를 표출한다.

예를 들어 어느 학생이 글을 하나 썼다고 하자. 가족이나 옆에 앉은 짝꿍에게 보여줬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자신감을 잃는다. 선생님은 부잣집 친구가 쓴 글만 잘 썼다고 칭찬해준다. 그러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에 손상을 입는다. 그런데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으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며 자긍심을 느낀다. 누구나 이렇게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

행복은 성취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해 온다. 우리는 무엇으로 성취감과 인정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를 권한다.

행복과 글쓰기 상관관계
행복과 글쓰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행복하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글쓰기는 나와 대면하는 것이고, 나를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 관해 아는 것이다. 둘째, 행복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면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질투하는 내가 보이고, 그게 바로 나라고 여기고 끌어안게 된다.  셋째, 행복감은 분노, 증오, 질투, 탐욕, 두려움의 감정이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 나온다. 글을 쓰면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넷째, 사람은 누구나 관심 갖는 게 있고, 그것에 몰입할 때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글쓰기는 가정과 일터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사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다섯째, 인간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행복하다. 글쓰기는 자신의 인내와 열정을 시험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글을 한편 쓰고 나면 뿌듯한 것도 그런 이유다. 여섯째, 사람은 누군가와 의미 있게 연결돼 있다는 유대감과 일체감을 느낄 때 행복하다. 글쓰기야말로 나와 다른 사람, 즉 독자를 연결하는 일이다.

행복한 글쓰기 단계
흑인 기타리스트 앤서니 웰링턴(Anthony wellington)가 동영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네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무의식적 무지입니다.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 기타를 선물 받아 갖고 노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론 행복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이 의식적 무지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깨닫게 되는 단계죠.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기타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대개 이 단계에 머물러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해요. 취미가 재미있지 않아요, 다음이 의식적 지식입니​다. 전문적 지식과 이론을 알게 되는 단계죠. 대부분 좋은 기타리스트들은 이 단계에 머물고 있어요. 항상 자신의 연주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해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어요. 끝으로, 무의식적 지식입니다. 생각하면서 기타를 치지 않아요. 모든 게 직감적으로 와 닿아요. 지극히 행복한 상태죠.”

행복한 상태는 무의식적 무지와 무의식적 지식 상태뿐이다. 아예 모르거나 푹 빠지거나. 중간단계는 행복하지 않다. 웰링턴은 단 한 가지만 있으면 누구나 무의식적 지식 단계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않으면. 한마디로 꽂히라는 것이다.

‘덕업일치’의 삶
한 곳에 꽂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소위 ‘덕후’나 ‘오타쿠’는 대부분 글을 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덕후가 돼야 하는지도 모른다. 꽂히면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안 보이던 게 보인다. 꽂히기 전에는 있는 줄조차 몰랐던 게 자꾸 눈에 띈다. 둘째, 모든 것이 재해석된다. 드라마를 봐도, 책을 읽어도, 친구 말을 들어도 꽂혀 있는 것의 프리즘을 통해 재해석된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 꽂혀 있는 사람은 밥을 먹을 때도 글 쓰는 과정과 음식 만드는 과정을 비교 설명하고, 산에 오를 때도 글쓰기를 등산에 비유한다. 셋째, 상상의 나래를 편다. 많은 시간을 꽂혀 있는 것에 관한 생각으로 보내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상하고 추론한다. 덕후들이 기발한 것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덕업일치’란 신조어가 있다. 덕후가 꽂혀있는 이른바 ‘덕질’이 먹고사는 업(業)이 되는 경우다. 덕업일치의 삶은 행복하다.

나의 행복 레시피 우리는 흔히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사랑할 때, 재밌게 놀 때 행복하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나는 두 가지 경우에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거나 남에게 인정받았을 때다. 이런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 관심 갖고 집중하는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측정 할 수 있어야 한다. 살 빠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체중계가 없으면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 없다. ▲반응이나 자체 평가를 향상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내가  이루려는 목표가 남에게도 유익해야 한다. 나는 그게 글쓰기다.
시인이 되고 싶고, 문예창작과 대학원도 다니고 싶고, 파위블러거도 되고 싶다. 그런 미래가 행복하고, 그런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게 즐겁다. 글쓰기가 나의  미래이고, 행복의 원천이다.


Ⅱ. 말하기,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별개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돼 있다. 예를 들어 말을 잘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간혹 글은 잘 쓰는데 말을 못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다. 글을 잘 쓰는데 말을 못할 리 없다. 말이 어눌할 뿐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래 일곱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당하면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말하기, 당신은 어느 유형인가
첫째,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설득이나 주장을 잘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기획이나 영업 분야에서 일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감성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같은 얘기를 해도 사람의 감정이나 정서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 연예할 때 잘 통하는 말재주다. 부하 직원과의 상담도 논리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게 좋다.

셋째, 비판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과 저의를 보고 파헤친다. 까칠한 느낌이 있지만, 이런 사람의 말을 들으면 후련하다.

넷째, 해학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유머와 위트가 있어 재밌는 사람이다. 농담을 잘하는 것과는 다르다. 재치가 있어야 한다.

다섯째, 본질적인 접근을 잘하는 사람이다. 길게 말하지 않는데 정곡을 찔러 말하는 사람이다. 선문답하듯 한두 마디로 핵심을 드러낸다. 대개 이런 사람은 말이 어눌하다.

여섯째, 지적으로 해박한 사람이다. 상식, 지식이 풍부하고 박학다식하다. 뭘 물어도 모르는 게 없고 말이 청산유수다.

일곱째,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다. 머릿속에 내용이 쏙쏙 정리되게 편안하고 친근하게 말한다.

말도 잘하려고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잘하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말 잘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우리 문화의 영향이 크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말 많으면 공산당’, ‘말보다 실천’, ‘침묵이 금이다’란 말도 이런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오늘부터라도 말을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자. 말하기 전에 좀 더 잘하기 위해 궁리해보자. 자투리 시간에는 주제를 정해놓고 중얼거리는, 말하기 연습을 해보자.

말 잘하는 사람은 글도 잘 쓴다.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논증하는 글을 잘 쓴다. 본질적인 접근을 잘하는 사람은 해법을 찾는 보고서에 능하다. 비판적인 말을 잘하는 사람은 문제를 찾아내는 글쓰기에 적합하다.

말하기를 통해 배우는 쓰기
글쓰기보다는 말하기가 쉽다.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말은 대상을 앞에 두고 한다. 상대 반응을 살펴가며 말할 수 있다. 상대가 내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지, 지루해하진 않는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말의 내용과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독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독자의 반응을 알 수 없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답답할 뿐만 아니라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지 확인할 수 없다.

말하기처럼 글 쓰는 방법이 있다. 독자를 상상하며 쓰는 것이다. 독자가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하듯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쓰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재미있어 할 것인지’ 상상하며 쓴다. 그러려면 독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자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역지사지, 감정이입이 충분히 되면 말하는 것처럼 쓸 수 있다. 나아가 독자의 시선으로 고쳐 쓰기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처럼 쓸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부족하면 자폐성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같다.

말은 말투, 얼굴 표정, 손짓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글은 순수하게 문자 그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미국 심리학자 앨버트 메러비안(Albert Mehrabian)은 의사 소통에서 상대방에 대한 인상이나 호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청각적 요소 38%, 시각적 요소 55%이고, 말의 내용은 7%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 유명한 ‘메러비안 법칙’이다. 말의 내용보다는 청각적, 시각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말은 음색, 억양, 표정, 손짓 등 청각적, 시각적 요소의 도움을 93%나 받고 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말의 내용이 정교하지 않아도 표정과 손짓으로 의미 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글도 말처럼 이런 도움을 받아서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말의 내용이 문자, 즉 텍스트(Text)라면, 음색, 억양, 표정, 손짓에 해당하는 것은 콘텍스트(Context), 즉 배경, 맥락이다. 글에서 배경과 맥락을 충분히 설명해주면 표정, 손짓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문자 메시지에서 ‘ㅎㅎ’, ‘ㅠㅠ’를 쓰는 것은 이런 노력 중의 하나다. 나의 상태를 알려줌으로써 의사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글을 쓸 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쓰지 말고,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와 배경을 친절하게 써줄 필요가 있다. 제3자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해가 안 되거나 모호한 부분은 없는지. 그리하면 말하듯이 쓸 수 있다.

끝으로, 말은 즉각적으로 한다. 말은 대부분 준비 없이 한다. 욕심 부릴 여지가 없다. 그러다 보니 과다한 수식이 붙을 틈이 없다. 직설적으로 핵심에 들어간다. 사람은 물에 빠지면 ‘사람 살려’라고 한다. 도둑이 들어오면 ‘도둑이야’라고 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자신이 아는 것을 보여주고, 잘 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궁리를 한다. 그만큼 쓰기는 어려워지고 글은 지저분해진다. 글을 말처럼 쓰는 방법은 있다. 시간을 정해놓고 쓰는 것이다. 욕심 부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글의 장점도 있다. 말은 고칠 수 없지만, 글은 고칠 수 있다. 잘 못써도 열심히 고치면 된다. 말은 하고나면 그만이지만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여러 사람에게 많이 보여주고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나은 장점이다.

읽기를 통해 배우는 쓰기
말하기와 쓰기, 못지않게 읽기와 쓰기도 관계가 있다. 아니 상관관계가 더 깊다. 읽기와 쓰기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읽기가 입력행위라면 쓰기는 출력행위이다. 입력 없이 출력이 좋을 리 없다. 반대로, 입력이 많은데 출력이 나쁠 리 없다. 그러므로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첫째, 글을 읽을 때 어휘와 개념에 주목한다.
​글을 읽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뜻과 개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파악하는 수준에서만 단어의 뜻과 개념에 관심을 가질 뿐, 어휘와 개념 자체를 파악하는 데에는 소홀하다. 글을 읽으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쓰기는 단어에서 출발한다.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 글이 된다. 글을 잘 쓰려면 알고 있는 어휘와 개념의 양이 많아야 한다. 어휘와 개념의 한계가 독해력의 한계요, 작문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알고 있는 어휘와 개념의 양만큼 생각하고, 읽고,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 개 미만의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과 3천 개 이상의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은 머릿속 세계의 크기가 다르다.

글을 읽거나 쓸 때,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열어두고 수시로 찾아보자. 요즘은 온라인에 지천으로 있다. 한두 번 찾아봐서는 그 어휘나 개념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찾아봐야 자기 것이 된다. 어렴풋이 안다고 넘어가지 말자.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뜻과 개념을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 의외의 소득을 얻는 경우가 많다. 몰랐던 뜻과 지식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는 일이 된다. 해보시라. 인간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뜻과 개념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둘째, 요약하는 훈련을 한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을 추려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요약 정리한다.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중요한 것에 번호를 매겨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요약에서 가장 낮은 단계는 발췌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장을 뽑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줄거리 요약을 한다. 영화를 보고 중요 장면을 말하는 것은 발췌이고, 전체 내용을 줄여 말하면 줄거리 요약이다. 마지막으로는 주제 파악이 있다. 가장 어려운 요약이다. 주제는 글을 쓴 사람의 의도나 목적,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쓴 사람이 문자로 알려주지 않는다. 문자 뒤에 숨어 있다. 행간에 배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주제 파악이다.

주제 파악까지 되면 요약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글도 잘 쓴다. 주제를 주면 한 편의 글을 써낸다. 글쓰기는 읽기의 역순이다. 읽기가 불필요한 것을 추려내고 마지막 한 두 줄을 남기는 일이라면, 쓰기는 한두 줄을 주면 여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읽은 사람, 잘 요약하는 사람은 쓰기도 잘한다.

셋째, 글의 구조를 분석하며 읽는다.
​글 쓴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함께 문장과 글의 구조를 봐야 한다. 필자의 문체, 저자가 사용하는 표현방식을 봐야 한다. 필자마다 시작하는 방법, 끝내는 방법, 설명하고 묘사하고 논증하는 방법이 있다. 정의 내리기, 비교와 대조, 구분과 분류, 예시, 인용, 비유하기 등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런 것을 분석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글을 쓸 때 써먹을 수 있다. 읽기에서 쓰기를 배우게 된다.

듣기는 말하기와 쓰기 출발점
사람의 오감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작동하는 기능이 듣기라고 한다. 죽기 직전에도 사람은 듣는다. 말하는 입은 하나여도 듣는 귀는 두 개다. 듣기는 그만큼 중요하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잘 들어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말을 심하게 더듬는 분이 있다. 병원에 가서 교정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장애를 안고 50년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보험회사 영업왕이다. 그것도 20년 가까이 그렇다. 비결은 단 하나. 잘 듣는 것이다. 말을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듣는다. 잘 들어줌으로써 고객을 주인으로 만들어 준 결과다.

잘 들으면 생각이 난다. 상대가 말하는 중에 가로막고 끼어든 적이 있는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들으면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 40% 이상을 듣기에 사용한다고 한다. 말하기나 읽기, 쓰기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이다. 듣는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멍하게 들으면 안 된다. 생각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피드백도 잘해야 한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 줄 안다. 그럼으로써 대화를 이어간다. 잘 들으면 말도 잘한다.

듣기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냥 듣는 게 아니고 관심을 갖고 듣는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인다. 상대는 잘 들어주는 게 고맙고,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힘든 줄 모르고 얘기한다. 듣는 사람은 정보를 얻는다. 말만 하면 정보를 잃지만 들으면 얻는다. 수지맞는 장사다. 정보는 글쓰기와 말하기 밑천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듣기를 게을리 한다.

잘 들어야 공감할 수 있다. 경청에도 급수가 있다. 단지 듣기만 하는 소극적 경청, 눈빛으로 호응하고 추임새까지 넣는 적극적 경청, 상대의 마음까지 읽으며 듣는 공감적 경청이다. 공감적 경청을 하는 사람은 온몸으로 듣는다. 격려해주면서 듣는다. 칭찬도 한다. 그럼으로써 관계가 좋아진다. 관계는 말하기, 쓰기의 토대다. 관계가 좋으면 말하기, 글쓰기가 수월하다.

오늘부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에 신경 써 보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삶이 달라진다. 끝.